light grey size=3 >
(무슨 말을 들려주리...)
친구의 슬픔을 어떻게 달래 줄 수 있을까? 무엇으로, 어떻게 위로를 해 줘야 될지조차 모르겠다. 세상에-----, 세상에 이럴 수가......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별별 상황과 부딪치게 되지만 이런 일도 있는 것일까? 흡사 구성 잘된 한편의 드라마라 하기엔 그 현실이 너무도 비통하다. 친구는 비통했고 나는 경악했다.
내내 애써 울음을 참으며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하는 그의 전화를 받은 건 그가 그의 아들의 결혼식을 마치고 4일째 되는 날 (9일)날 밤이었다. 불과 4일 전, 그러니까 4월 5일 나는 그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왔었다. 30년도 더 오래전 (1969년) 우린 문학동인 "文井"에서 만났다. 그 때 만났던 또한 문우인 강兄 내외와 우리 내외는 부천의 그의 혼사에 기쁨과 축하하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그의 부인 또한 우리 동인이었는지라 우리와는 각별한 사이다. 그런데 예식이 거행되는 교회 입구에서 만난 그들 두 내외의 눈동자 가득히 알지못할 숙연함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고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평소같으면 방가움에 어쩔 줄 몰라 폴짝폴짝 뛸 그의 부인이 웬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흔히 딸을 시집보내는날 신부 부모들이 그런 침통한 표정을 갖는 건 보았지만 아들을 장가 보내는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참석해 준 손님들에 대한 고마움에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우린 그냥 가볍게 넘겨 버렸다. 나와 강兄 두 내외는 교회의식엔 참석치 않고 피로연 장소로 옮겨 몇 잔의 술만 들고 일어났다. 이런 날은 빨리 가 주는 것도 부조라는 강兄의 지론에 밀려 그와 그의 부인도 다시 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 경사스러운 날 그와 그의 부인의 눈에 맺혀있던 보일 듯 말듯 하던 눈물의 의미를 안 건 그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세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다. 상황은.......
4월 2일, 그러니까 혼사가 있기 4일 전, 손주의 혼사를 보고 싶어 하시며 그리도 그 경사스런 날을 기다리시던 모친이 갑짜기 쓰러지신 거다. 평소의 지병인 심근 경색증인가? 그것이 갑짜기 일어난 거였다. 모든 식구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부랴부랴 응급실로 옮기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담당의사의 말을 듣고 모두는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혼사는 목요일인데 수술은 화요일과 목요일만 가능하다는 병원 측의 사정에 따라 천상 다음날인 화요일에 수술을 할수 밖에 없었다 혼사라는 일 하나만으로도 한 집안의 대사인데 제일 큰 어르신의 뜻하지 않은 수술까지 겹쳤으니 모두의 마음은 어떠했으리라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짐작이 가는 노릇이었다. 다음날, 그러니깐 혼사 3일 전 수술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련가, 아주 간단하리라던 수술이 잘못된 것이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모친은 끝내 저녁 8시경 사망 선고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망연자실..... 우리네 풍습대로 3일 장으로 장례를 치른다면 바로 혼사날 바로 그날이 아니던가, 어르신의 급작스런 부음은, 슬픔을 느낄 수도 없을만큼 그들의 눈앞에 졸지에 벌어진 일이라 무엇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너무도 암담할 뿐이었다. 초상과 혼사..... 단하루의 차이도 아닌, 그것도 같은 날이라니....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조차 감춘 채 모든 식구들이 그들앞에 던져진 이 모진 시련을 어찌 뚫고 나갈 것인가에 대해 복받치는 설움을 참으며 의견들을 나누었다. 혼사를 연기해야 된다는 게 대체적 중론이었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치 만은 아닌 일이었다. 사둔 측의 사정은 또 어떠하리... 가깝지도 않은 경상도 창원에서 이번 혼사를위해 그들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인가, 손님 초대며, 차량 예약이며,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할 무수한 준비들을 어찌 파기 시킬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 내리기 어려운 판단을 교회의 목사님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다. 장례를 하루 연기하는 수 밖에... 혼사는 그냥 단행하자... 목사님이 내려주신 결론이었다. 다른 손님들에게조차 이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고 시간도, 경황도 아무 것도 없었다. 안으로 넘쳐나는 슬픔을 억지로 참으며 눈물의 혼사를 어떻게 마쳤는지... 아무 것도 기억에 없단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칠 줄이야. 이날 맞아 드린 며느리는 이 날 하루 3번의 서로 다른 옷을 갈아 입어야 했다. 예식용 드래스와 폐백용 한복과 그리고 상복을 입어야 했다 예식을 겨우 마치고 모두 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그때까지 유보시켰던 어르신의 염을 해드리고 다음 날 모두 참았던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내며 선산인 조치원으로 향했다. 그제서야 제일 큰 맞손주의 결혼을 그리도 보고파 하셨던 어머니의 죽음이 그들 앞에 닥쳐온 현실이라는 걸 실감 할 수 있었다.
曲豆야~, 무엇으로 어떤 말로 너를 위로해 주리. 넘쳐나는 눈물 꾹꾹 참으며 일생 중 단한번 뿐인 아들의 경사스런 혼사의 기쁨마저 잃은체 어머니를 여읜 비통과 슬픔에 쌓여 요 며칠동안 너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보내었으리. 우리 가끔 즐겨쓰던 소설 속에서나 그려내던 그런 엄청난 극적 상황이 네 앞에 닥아 올 줄이야... 그러나 어떻하니.. 현실인 것을... 더구나 너는 믿음 속에서 너의 모두를 주님에게 의탁하고 사는 신앙인이 아니더냐. 그래. 나는 믿음의 힘도 깊이도 모른다만 너는 충분히 그 믿음 안에서 너의 이 시련과도 같은 고통 이겨낼 수 있으리라 느낀다. 아직은 너의 마음이 경황없는 가운데 애통함에 젖어 있으리라. 우리,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마음이 조금 더 가라앉은 다음에 얼굴 보기로 하자. 그 때 너 비록 못 마시는 소주지만 내가 딱 한잔만 따라주고 싶구나. 어멋님의 명복을 빈다.
id="Real System">
value="
http://www.musiceye.net/classic/orchestra/beethoven-symphony9/track_04.ram
">
light steel blue size=2 face= 가을체>(흐르는 곡은 )
이 칼럼은 말인의 black size=4>자작시와 글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