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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기술』/ 프랑코 라 세클라 지음 / 임왕준 옮김 /

末人 2007. 9. 8. 10:03
『이별의 기술』/ 프랑코 라 세클라 지음 / 임왕준 옮김 / 조영 그림 / 기파랑 에크리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는 인연의 무상성을, 기억의 덧없음을 처연하게 읊조린다. 서른 즈음이 시작되면, 늘 알뜰하게 채워져 오기만 했던 20대까지의 하루하루는 점점 무언가를 비워가는 아픈 과정으로 변모한다. 내뿜은 담배 연기에서 멀어져 가는 또 하루를 발견하는 서른 즈음은, 사랑보다는 이별을, 열정보다는 추억을 곱씹어보기 시작하는, 진정 빼도 박도 못할 ‘성인’의 출발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나이일까. 머물러 있는 줄로만 알았던 청춘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연인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만 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하룻밤 달게 자고 나면 밝아오는 하루는 그저 희망찬 미래만은 아님을. 또 하루가 밝아오는 동안, 또 다른 하루는 멀어져가고 있음을. 하루하루 살아가며 어른으로 커가는 20대까지는 늘 살아온 날보다 서너 곱절은 더 이어질 것만 같은 내일이 한없이 벅찰 수도 지겹도록 막막할 수도 있지만. 서른 즈음을 넘어가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끝을 향해 치달아가는 시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가끔은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가 단지 이별의 어둠을 그려내는 가사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한 번도 이별을 배우지 않은 채 덜컥 이별에 맞닥뜨리지만, 사실은 매일 조금씩 이별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금슬 좋은 부부조차도, 매일 밤 잠들기 직전에는 이별을 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쩌면 매일매일 이별을 실습하고 있다. 잠들기 전에 우리는 다음날 가족이나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보증수표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잠이 들어야 하고 출근을 해야 한다. 이별은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것이다. “매일 이별하고 있구나”라는 아픈 가사는 어쩌면 매일 이별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인연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별은 사랑의 파국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 내재한 사랑의 이면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그저 만남 자체에 깃든 이별의 암호로 인해 오히려 넉넉해지는 인연의 여백을 생각해 본다.

오늘 소개할 책 <이별의 기술>은 단지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지침서는 아니다. 이별에 대한 역사적․ 이론적 접근에 그치지도 않는다. 이 책의 저자 프랑코 라 세클라는 우선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이별의 경험, 그 총천연색 슬픔과 우여곡절의 그림자 속에 푹 빠져들게 한 후, 자기 자신의 숱한 이별조차도 당신들처럼 미치게 아프고 지독하게 어이없었음을 고백한다. 이 책은 이별을 애도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 모든 이별의 피해자들과 함께 ‘이별의 고통’이라는 제물을 한 상 버젓이 차려놓고 이별의 축제를 벌인다.

이별은 심판이 없는 유일한 게임이다. 이별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지만 너나없이 두 선수 모두 생의 모든 게임 중 가장 처절하고 필사적으로 게임에 매달린다. “이별의 순간에, 우리는 가장 악랄한 적에게도 하지 않을 짓을 서슴지 않고 상대에게 저지른다. 사랑은 이해의 수준을 뛰어넘는 힘과 권능을 발휘한다.” 이해 너머, 관성 너머, 생 자체의 중력을 넘어 존재하는 강력한 실체, 이별. 사람 안에, 삶 안에 그 일부로서 존재하지만 사랑보다도 삶보다도 더 거대하고 육중하게 우리를 짓누르는 이별. 이별은 사랑이라는, 혹은 삶이라는 전체집합보다 훨씬 큰 부분집합은 아닐까.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별은 다른 모든 인간사에 비해 철저한 타자로 전락한다. “서구에서는 이별을 위한 어떤 제식이나 절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공백으로 남을 뿐,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서구인들에게 이별은 일상적인 공간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세상의 일’이고 사회가 이해하거나 통제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른바 ‘원시적인 사회’에서 이별은 일종의 공동체적 향유의 체험이다. 나이지리아 부족, 이리그위의 경우는 부부가 이별할 때 부족 전체가 참여하여 가족 구성원들과 부모 자식 사이의 단절이 초래하는 피해를 막으려고 애쓴다고 한다. 공동체 전체가 단 한 쌍의 커플을 위한 이별의 제식을 준비하는 동안, 이별 자체가 제식에 흡수되어 버리며, 결국 이별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슬퍼할 겨를은 거의 없게 된다. 어떤 부족은 ‘이혼 축제’까지 있단다. “여성이 버림을 받으면, 그동안 남자에게 제공해온 자신 소유의 천막은 물론, 모든 짐을 꾸려서 즉시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남편을 포함한 부족민 모두가 참가하는 이혼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떠난 여성이 새로운 짝을 만나게 되면 ‘재혼 축제’도 열린다. “헤어진 시점에서 아내가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3개월이 지나면 여자에게 청혼하는 구혼자들과 함께 또 한 번의 축제가 열린다.” 이혼 축제나 재혼축제는 슬픔을 씻어버릴 수 있는 기회이며 이별의 당사자나 자녀가 이별로 인해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제의적 행위다.

이렇게 본다면, ‘문명인’의 이별 문화는 이혼을 비롯한 각종 이별에 대한 자책과 자기 파괴의 문화일지도 모른다. 이별을 철저히 개인적 경험으로, 밀실에서 혼자 아파해야할 부끄러운 경험으로 유폐시키는 것이야말로 이별을 타자화시키는 근대적 습속일 것이다. 이별은 나만의 일이며, 나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고립감이야말로 이별의 당사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문화는 아닌지. 이별에 관한 한 우리는 언제나 브레이크는커녕 시동도 걸 수 없는 완벽한 초보자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징벌하듯”, 예외 없이 찾아오는 이별의 고통. 누군가 이별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던 행동을 완전히 멈추면, 우리는 그동안 그가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허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별 때문에 삶의 시계가 온전히 멈춰 버린 듯, 생의 퓨즈가 완전히 나가버린 듯 속절없이 헤매는 그 시간이야말로, 이별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탕진하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온전히 ‘나다운’ 시간이 아닐까.

아마 세상 모든 이별의 경험과 노하우(?)를 합쳐서 한 오백만 권의 사례집과 공식해설서와 연습문제집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이별의 극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별의 그 치명적인 극복불가능성을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데만 기여할 것이다. 이별의 기술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별자체의 속성이다. 이별의 기술은 원래부터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책, <이별의 기술>의 첫 번째 비밀이다. 이 책의 지은이 프랑코 라 세클라는 ‘이별을 극복하는 101가지 처세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별 앞에서는 모두 철저히 무방비상태의 갓난아이임을 긍정하자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