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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인의)청춘을 돌려다오- 7 (한국낙서회)
末人
2005. 5. 28. 22:28
(한국 낙서회)
말인의 여인 이야기로 부터
잠시 화제를 돌려보겟다.
회원님들이
나와,제강과,서래옥의 이야기를 듣고싶다는
빗발치는 독촉을 받았기에
그 이야기부터 먼저 하고 넘어 가야겠다.
한국낙서회...
1분 예술,찰라문학,
재치와 위트, 번뜩이는 유모..
모두들 낙서라면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다.
패러독스한 궤변들의 귀재였다.
제대를 하고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문정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갈 곳이 없었다.
래빈더도 떠났고
문정도 없고...
문정맴버였던 k녀를 만났다.
낙서쟁이들이 자주 만나는
명동 유네스코 회관 뒷골목으로 이전한 학사주점,
그 곳에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까지
둘은 술을 마셨다.
우리
둘이서 뭔가 모임을 하자...고
술 힘을 빌어 제안햇다.
선뜻한 오케이...
50 %의 찬성만 있으면
무슨 일이고 해야 한다는
단 한귀절의 회칙으로 둘은 모임(?)을 시작했다.
한사람이 술을 마시자면 마셔야 했고
한사람이 여행을 가자면 가야했다.
50 %의 위력은 대단한 독재였다.
허지만
너무도 편하고 좋았다.
덕분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만나봤자
하는 일아라곤
찌그러진 주전자에 탁주를 받아놓고
하얀 사기 주발에 따라 마시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얼마 오래지 않아 실증이 났다.
남녀 단 둘이
50 % 의 의견만 있으면 100% 실행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기발한 규칙을 정해놓고 벌린
애정 행각이었지만
허망한 것은 그 곳에
아무런 애정이 없었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마음이 답답하거나
가슴이 허전할 때면 우리는 모임을 소집했다.
단 둘이 하는 모임,
언제나 참석률은 100% 일 수 밖에 없었다.
다방 구석에 앉아
성냥개비 퍼즐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고
가끔은 혼잡한 남대문 시장통을 함께 기웃거리기도 했다.
너무도 자주 만나다보니
그녀가 여자라는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만나는
모임에서의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었다.
의미없는 모임은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어느 날
해산을 선언하고 그녀와 결별했다.
그리고 한동안 장편을 구상하며
하는 일 없이 빌빌거렸다.
그러다
갈 곳 없으면 학사주점을 들렀다.
어느 때고 그 곳에 가면
낙서쟁이들이 모여앉아 술판을 벌리고 있었기에
부담없이 찾아가곤 했다.
이가 유난히도 하얀 자칭 국보라고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처럼)칭하는
최선우.
유난히도 술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나는 그와 자주 어울렸다.
서울상대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그는 아무런 직업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박통이 팔레비 되기만을 기다리던 친구였다.
(축출 당한 이란의 팔래비 왕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물러나기를..)
그와 나는 명동의 또 다른 명소인 25시 술집을 찾아갔다.
젊은이들로 아래 층, 2층이 언제나 만원인 술집이었다.
벽에는 온갖 낙서들로 가득찬 집이었다.
화장실도 그냥 평범하게 WC 라고 써 놓은 게 아니라
통쾌통이라고 써 놓을 정도로
그 주인은 낙서를 사랑했다.
그 25시의 사장과 만나
꽁트낙서전을 그곳에서 열기로 했다.
말인,국보,석초,곡두 4인이었다.
한국일보의 정홍택 차장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후원은 한국일보였다.
주간지와 한국일보에
우리의 전시회를 알리는 홍보광고가 박스로 실렸다.
그걸 보았는지
어느 잡지사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해 오기도 했다.
무질서하던 술집 벼름박에
제법 체계가 집힌 낙서와 짧은 꽁트를 전시해 놓자
많은 젊은 손님들이 좋아했다.
25시 사장은
우리에게 협찬금도 주었고
술도 몽땅 공짜로 제공해 주었다.
낙서나 꽁트가
돈은 안되었지만
이렇게 가끔은 술이 되어 주곤 했다.
생각나는 최선우의 낙서 하나
연애 할 때는 이거 먹을래 저거 먹을래 하던 남편이
결혼하고 애 둘 낳자 돼지같이 처먹긴....한단다.
또는
주택복권 한장 사놓고
밤새도록 예산안 짜다보니 날샜다라던가..
명동에서 비실대던 그를 10년 지난 80년대 초
부산 국제신문사에 낙서 때문에
무슨 상을 하나 받으러 내려갔다가 다시 만났다.
역전까지 마중 나와있던 그가
나를 끌고 송도로 데리고 갔다.
송도의 어느 술집에서 술을 먹던 그가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고프다며
갑짜기
안주머니 가득 넣고있던
지폐뭉치를 꺼내 거리에 뿌려댔다.
나 역시 만취된 상태라 말릴 겨를이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후
택시를 탔다.
외항선을 타는 뱃사람들을 상대로 성을 파는 완월동..
쇼윈도우마다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아가씨들..
그는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그런 술집을 두 군데나 경영하고 있었던 거였다.
직업은 그랬지만
돈은 잘 버는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친구,
색씨 장사를 하고 있던 엘리트..
한국낙서회에서 만난 또 한사람의 기인 강태공~!
그는 항상
도루구찌라 일컬어지는 둥그런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자칭 고물장수라는 그,
장사동에서
무슨 부품가게를 하는 돈 잘버는 사장이었다.
그는 항상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독설을 퍼붓는데 일가견을 가진 친구였다.
한국최초로
도끼로 이마까(일본의 잔인한 사람)
깐이마 또까(그 잔인한 놈 보다 더 잔인한 넘)
안깐데도 골라까(깐이마또까보다 더 잔인한 넘)
알간디 모르간디(인도의 건망증환자)
베드로 누워(프랑스의 창녀)
소피마르소(프랑스의 오줌소태환자) 등등의
낙서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그들의 낙서를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강태공은
아무 데고 찾아가 퍼져 자는 역마살이 낀 친구였다.
한잔 마시고
낙서인들 집에 찾아가 자며
장롱이고 침대고
소변을 마구 갈겨놓고 오는 웃기는 친구였다.
명함엔 언제나
한국낙서회 회장 강태공이라는 직함을
큼지막하게 새겨넣고 다니던 그...
그럴만도 했다.
우리에겐
각종 잡지사,신문사,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인터뷰는 주로
커다란 술집을 빌려서 하곤 했다.
한잔 먹여놓은 후
얼큰한 상태에서 내뱉는 독설들을 기사화했다.
그렇챦아도
말꼬리 잡는 데 선수들이요,비꼬는 데 일류들인데
한잔 마신 상태에서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은 독설들을 쏟아 놓곤 했다.
똥배라는 필명을 사용하던 오진근
귀공자 스타일의 배 튀어나온 그는
낙서 때문에
mbc 코메디 프로에 스크립터로 들어간 친구였다.
전공하고는 전혀 다른...
어쩌다 낙서를 알게 되어
낙서를 직업으로 삼는데 성공한 케이스였다.
우리도 후에
김웅래 피디(당시 동양텔레비젼)나
김경태 피디로부터
코메디 원고 청탁을 받아 몇 편씩 써주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말인도 이 때
잠시 낙서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한국일보사 주최로 한국일보 11층인가 대강당에서
전국낙서인대회를 한국 최초로 열었을 때
내가 뜻하지 않게도 대상을 차지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 때 쓴 낙서 중에 한 두개 생각나는 것,
슬프기에
기쁘노라----장의사
입시생들이여~!
엿 먹어라~!!
오~!
드디어 때는 왔도다<--목욕탕주인
여권상위시대를 부르짖는 마누라들을 위하여
마누라의 고된 일들을 분업해 주어야 한다.
빨래하는 마누라 따로 두고
밥해주는 마누라 따로 두고
애 낳아 주는 마누라 따로 두어야 한다. 등등...
오~!
나의 태양이여~!
---양산장수-
그 후로
중앙일보 낙서대회에서도 몇번 상을 탔고
그리하여
혼자 낙서클럽을 독단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하기도 했었다.
뽀빠이 이상룡씨도 처음 데뷰햇을 때
우리의 낙서를 많이 가져다 썼다.
각 방송국이며
각 잡지들에서도
우리의 낙서는 무단으로 사용 당했다.
우리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면 목청을 높이기도 했지만
낙서를 돈 받고 팔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는
한번도 마련해 보질 못했다.
김병조씨는
일요일일요일밤에 출현하며
우리의 낙서를 단골로 가져다 사용하곤 했다.
이상룡씨나 김병조씨는
한국낙서회와 각별한 친목을 유지하기도 했다.
인기는 있었지만
돈 한푼 생기지 않는 작업..
후에
만화를 그리는 친구들이 합세하며
한국낙서회는
토월회로 분파되어 진다.
일간스포츠와 서울신문에 4거트짜리 대추씨라는 만화를 연재하는 조기영화백,
각종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던 최낙수..
십자말풀이만을 전문으로 만들어 내어
각종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에 출제하던 강주현...
너무도 오래 전 일들이라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점이 너무도 아쉽기만하다.
★(그 당시에 썼던 400자 꽁트 하나)
(말인꽁트)
눈꽃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머리를 덮는다.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는
훈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며 그녀는 비시시 웃었다.
"훈아, 화 났어?나 약혼하기로 한 것 때문에?"
"........."
"어쩔 수 없었어.
아빠가 너무 위독하시잖아.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시는데
사윗감을 꼭 보고 돌아가시겠다는 거야.
그리고 우린 애당초 약속했었잖아.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
그녀의 출렁이는 머리가 은빛으로 빛났다.
수은등이 외롭다.
가로수 가지마다 눈꽃이 하얗게 피어있었다.
"훈아, 너 말 안해?
하기 싫어?
그럼 나 먼저 간다."
".........."
"훈아,
이 바보,
넌 바보야.
왜 말을 못하는 거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왜 못 들려줘?"
순간 훈이 고개를 들더니 반사적으로 와락 자애를 가슴에 담았다.
뜨거운 입술이 왔다.
" 나, 약혼 했다는 것 거짓말이야."
"자애야.
사랑한다.
사랑해~~~!"
절규와 같은 그의 음성이
쏟아 붓는 눈발 속에 묻혀 날리고 있었다.
가로수엔 눈꽃이 더욱 크게 피고 있었고.....(1971,12월)
지금 읽어보니 조금은 유치하다, ^^8
허지만
그 당시엔
10대 20대의 처녀들에겐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곤 했었으니... ^^*
아무튼 이 때 경험한
인기라는 것은 정말로 누구나 한번쯤
가져볼만한 매력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알고보면
인기라는 건 별거 아니다.
배용준에 대하여
일본 여자들이 그렇게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지만
도대체 난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강남
어느 주택가 뒷골목
배용준 사무실 앞엘 갔었다.(그 사무실이 거래처인지라..)
일본 여자들이
배용준도 없는 그 사무실 주택이 있는 골목까지
모범택시를 타고와
사진들을 찍고 가느라고 야단법썩을 떠는 걸 보았다.
웃기는 일이다.
젊은 여자들이 그렇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나이살이나 듬직한 중년여인들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원...
아무튼
나의 청춘을 돌려달라는 노래는
회원님들이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치기 전까지는
목이 쉴 때까지
계속계속 이어질 것이다.
(문정동인 박석수의 시)
http://poemmts.com/board/buboard.cgi?db=0007&act=read&page=1&num=83
마을은 철조망 속 휘파람
소리 일찍 저물고
저문 들녘의 무거운 정적 속에서
구중의 땅 밑을 헤매던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왕복 엽서처럼 구겨질 대로 구겨진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철수하는 미군의 가슴이나
태평양이나 아메리카로도
닦여지지 않는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한반도의
가장 참혹한 노을이 되었다
-「노을 - 쑥고개 · 4 」전문
(시조시인 경암스님)
http://www.songhwasa.or.kr/down3-1.htm
(고스톱 전문가 이호광)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35788
출처 : (말인의)청춘을 돌려다오- 7 (한국낙서회)
글쓴이 : 末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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