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

태백산-2008.1.27

末人 2008. 1. 28. 17:12

오랫만의 먼 나들이 산행이다.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설레이는 마음에
간밤 내내 잠을 설쳤다.
퀭한 눈으로 집을 나섰다..
6시가 채 안된 시간은 한겨울의 새벽이라
세상은 아직도
깊은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나름대로 완벽한 채비를 차린 탓에
걸머진 베낭이 꽤나 무겁게 느껴진다.
과연 오늘은 어떤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될 것이며
또 어떠한 일상들이 기다려 줄까?
축제기간이라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짜증나는 시달림이나 실컷 받다가 오는 건 아닐까?


썰렁한 새벽냉기를 타고 아직도 검게 출렁이고 있는 어둠을 뚫고
건대역에서 군자역까지 걸어가면서
회원들 하나하나에게 문자를 날렸다.
노원에서 탄다는 홍들레는 과연 제 시간에 나오긴 나온 걸까?
덕소의 예봉님은 늦지 않게 출발을 했나?
군자로 온다는 구슬님은?...

노원에서 버스를 탔다는 홍들레님의 전화를 필두로
벌써 군자역 7번출구에 와 있다는 구슬님,
상봉역에서 택시를 탔다는 예봉님....
모두 늦지않은 정시에 군자역에서 합류하고
사당에서 무소구님, 첫발자욱님까지
우리 일행 6명의 합류는 예정된 시간에 모두 완료되었다
동트는 새벽...
이제 버스는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태백....
오래 전 그 어느 이른 봄날.
태백으로 시집 가던 예쁜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
산허리에 아직도 녹지않은 눈들이
희끗희끗 남아있던 통리재를 넘어 가던 그 옛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흑연탄이 녹아들어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은 물들이 산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모습과
하이얀 눈빛같이 화사한 면사포에 싸여
수줍은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집가던 날의 여동생이 문득 보고파진다.
태어나 처음으로 맛본 그린색 병의 경월 소주..
그 소주 맛이 너무 순하여 몇병을 챙겨갖고 오던 일들...
그 때만 해도 젊었었는데...
아무튼 오늘의 여행이 바로 내 젊었던 그 어느 한 때로 향하는 듯 하여
마음이 설렌다.

지난 한 주
수없이 퍼부어댄 덕에 풍부한 적설량이
강원도의 산마다 하이얗게 쌓여 있었다.
 
11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유일사 주차장.
벌써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관광버스들의 행렬을 보며
오늘 산행이 여간 복잡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패이츠,아이젠,두툼한 장갑까지 갖추고 산행에 나선다.
장사진을 이루고 오르는 수많은 산객들 틈바구니에 끼어 걷다보니
산행속도가 영 나질 않는다.
이렇게 가다보면 약속된 시간까지 과연 하산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어쩌랴
아니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간간히 피어있는 눈꽃이 아름답다,
속도가 나질 않으니 산행이 별로 힘들지가 않다.
눈길을 걷고
주목군락지를 지나고
장군봉,천재단까지 오르는 동안
한국의 모든 등산 애호가들이 모두 이 태백산으로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웅장한 태백산에 안겨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겨울 설산의 진미를 맛보겠노라던 꿈은 어느덧 사라지고
동대문 시장을 비집고 다니는 듯한 복잡함 만을 느껴야 했던 산행...
저 앞에 보이는 문수봉을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아니...
일몰전까지 하산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망경사로의 하산을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시달림을 받는 태백이지만
그는 참으로 의연키만 하다.
수많은 산줄기들이 그에게로 몰려들고
수많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 제왕같은 모습이지만
인간들의 정복력에 무참히 밟혀가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다..

산길도
주목도
눈꽃축제장도,
주차장도,
화장실도,
매점들도...
그 어느 곳 한군데에서도
도시를 벗어나 한가롭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려던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곳은 없었다.

모처럼 서울을 벗어난 해방감에
잠시나마 한잔 술의 풍류를 즐겨보겠다고 찾아들어간
먹거리 장터같은 천막집에서조차
굵은 멸치만한 빙어튀김 한마리에 800원을 받아버리는
태백의 무지막지한 상술 앞에서는
나의 두 팔에 나머지 5회원님들의 열 팔까지 합쳐
열두팔을 들어 항복을 외치고 말아야 했다.

그러나...
그나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촐촐함에 잠겨있던 우리 일행들에게
감로수와도 같은 소주 한잔을 권해오던
처음 만난 신하사님의 따뜻한 인정에
오늘 하루의 짜증나고 불쾌했던 모든 것들을 잊기로 했다.

자정이 가까와 오는 한밤중...
군자역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던 그 순간
그래도
오늘 함께 했던 모든 분들과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보다 베낭이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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