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1

[스크랩] 수락산행후기

末人 2008. 10. 28. 18:38
숲속의 매미가 노래를 하면
파란 저 하늘이 더 파래지고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
숲속의 매미가 노래를 하면
찬이슬 아침마다 흠뻑내리고
가을이 저만큼 다가온다죠

이태선님의 동시를 빌리지 않더라도
산에는 벌써 가을이 느껴진다.

탁트인 전망좋은 바위위에 자리잡고 앉아
반주를 곁들여 오찬을 즐긴 후
세상사 잡담에 한동안 넋잃다 보니
온몸이 으실으실 추워온다.

땀흘린 뒤 끝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온세상을 다 태울 것 같던 태양도
그 기세가 한풀 꺽인 듯하다.

매미 울음도 힘이 빠진 듯
늘어져 들려오고
나뭇가지들의 흔들림은 제법 커졌다.

벼랑 끝에 피어있는 한송이 작은 꽃이
파아란 하늘에 박혀 더욱 노랗게 보인다.

어찌 올라왔는지
빨간 고추잠자리가
가만있는 꽃술을 괜시리 건드려 보곤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베낭 속에서
긴팔 옷을 꺼내 걸치니
금새 따뜻한 체온이 돈다.

이게
가을이구나...

꼬리글없이 함께한
영신사님과
오늘 급하게 이름 부쳐준 투덜스님,
그리고
40년 산꾼 오페라유령님이 있었기에
하마트면 아주 단촐한 산행이 되었을 하루가
그런대로 시끌할 수 있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야생화님
미소가 소박한 태양님,
박력있는 위원장 경주님과 더불어 시작한 산행은
5시간을 소비하고야 끝났다.

산중
우뚝한 바위 위에 서서
그리운 금강산을 뽑아제끼는 오페라유령님에 질세라
위원장 경주님도
오늘은 유행가를 피해
가곡만을 토해낸다.

저들이 연출하는 가곡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
한동안
어린시절로 돌아가
무욕의 순수를 즐기니
세상이 아름다와 보인다.

여자를 멀리하고
속세에 연 맺지 않고 산다는 오페라유령님의
독신예찬론에
한동안 귀기울이고 있노라니
그의 고집스런 자유의 삶이 부러워지기까지 하다.

동표 골뱅이 한깡통을 쏟아붓고
매웁기 그지없는 고추가루에
실파를 썰어 버무린
을지로표 골뱅이로 일차를 하고

흡사
시골 간이역같은 장암역 육교아래
넓은 목조건물 매점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흘러간 유행가 가락을 안주삼아
또다시 한잔씩을 곁드리고

어둠을 등에지고
돌아오는 길...

누구처럼
산이 있어 행복한 말인이 아니라

이 하루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행복한 내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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