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1

역사 속의 라이벌-3(김상헌과 최명길)

末人 2005. 5. 18. 18:38
3. 김상헌(金尙憲) VS 최명길(崔鳴吉) 주전론자(主戰論) 김상헌(1570~1652)과 주화론자(主和論) 최명길(1586~1647).. 이들 라이벌에 붙는 수식어 입니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은.. 명분에 입각한, 민족의 자존심이었고,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은.. 실리를 중시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1618년 광해군(1608~1623)에 의해 인목대비 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김상헌은.. 폐모론에 격렬히 반대하다 낙향하였고, 최명길은.. 이귀, 김류와 함께 반정세력에 가담, 훗날 인조반정(1623)을 주도하게 됩니다. 제16대 인조(1623~1649)의 집권 이후,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義)가 일어나자, 김상헌은.. 대의에 어긋나는, 공과 사를 구분해야할 일이라며 반대하였고, 최명길은.. 대의에는 어긋날지 모르나, 임금의 입장이 중요하다며 인조를 지지합니다. 김상헌은.. 주로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강력한 언론활동으로 국정을 견제하였고, 최명길은.. 주로 이조,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고 국정을 주도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이때부터 두사람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조정은.. 이들을 따르는 주전론자들와 주화론자들로 양분되어, 매일 치열한 격론을 벌였고, 명분보다는 실익이 중요하다는 대세에 힘입어.. 최명길이 강화를 주도하게 됩니다. 청군에 의해 남한산성이 포위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최명길은.. 인조가 있던 남한산성과 청군영을 부지런히 오가며 강화를 준비하였고, 김상헌은.. 그런 최명길을 신랄히 비판하며, 계속해서 척화를 주장합니다. 최명길에 의해 항복문서가 만들어지자, 김상헌은..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고 대성통곡 하였으며, 최명길은.. 그런 김상헌의 행동이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며, 힘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되자, 김상헌은.. 국치를 한탄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두문불출 하였고, 최명길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복잡한 대외문제등 전후처리를 담당하게 됩니다. 끝까지 대의를 지키고자 분전한.. 청음 김상헌은..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당대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지만, 끝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분전한.. 지천 최명길은.. 당대의 성리학적 사대 분위기에 밀려 폄하되었고, 결국 변절자로 치부 되었지만, 국가와 민생을 위해, 대의를 버린 소인배라는 비난마저 감수한.. 용기있는 행동으로 후대의 선비들에게.. 재조명 받게 됩니다. 병자호란과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과연 누구의 행동이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는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는 지천 최명길.. 두사람의 의견은 이리도 극명하게 갈렸지만, 분명한건..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닌,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김상헌과 최명길.. 이들이야 말로.. 아직까지도 그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진정한 역사의 라이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