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1

그녀--7

末人 2005. 8. 31. 14:23

그녀....7


그 날이 그 날 같은
색깔없는 일상만이 지속되는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가끔
그 곳으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자고 깨면 언제나처럼
거기엔
내 식구가 있고
내 물건들이 놓여있고
내 변함없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고 살다가도
불현듯 이건 아니야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을 때
일어나 갈 곳이 없어
그냥 주저앉아 버리곤 한다.

이러던 나에게
언젠가 우연한 기회에
갈 곳을 만들어 준 이가 생겼었다.

그야말로
저녁먹고
슬리퍼 찍찍 끌고 가서 만나도
조금도 부담없는 그녀...

그녀를 알게 된 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그 해 가을도 깊어만 가고 있었다.

만산에 홍엽이 물결치던
십 여년 전 그 해 늦가을,
도봉산을 오르며
친구인 그가 바로 2일 전
관악산을 혼자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연찮게
등산로에서
어느 젊은 여인네 둘을 만나
함께 등산하고
그냥 서로 제 갈길로 헤어져 왔다는 이야기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인상들이었고
함께 점심도 나눈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있으랴 하며
우린 산길을 걸었다.

포대능선을 지나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얼마만큼 내려오자 마당바위가 나타났다.
우린 그곳에서 쉬다 가기로 마음 먹었다.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친구인 그가
어느 여인네를 보더니 반색하며 놀라는 것이 아닌가?

바로 엊그제 만났던 그들이라는 것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완벽한 우연이었다.

환한 미소가 돋보이던 그녀...
그것이 그녀와의 시작이었다.
 
그날 나눈 자축의 술잔을
우리는 두고두고 복습을 해댔다.

갈증이 나거나
삶이 답답하거나
아니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하고 싶을 때면
우리는 술잔을 나눴다.

그 것이 이제 11년째...

애타게 보고 싶은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마음 한켠에 처 박아 둘 수만도 없는 관계...

그녀가 원하거나
내가 원하거나
우린
오로지 한잔 술잔을 나누기 위하여
끈질나게 연락하며 지내왔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피안이 되어주었고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더러는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게 서로 때문에
애도 탔었고
서로 때문에 앙탈도 부렸다.

40대 초반의 그녀가
50대 초반의 중후한 여인네로 변해있지만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순수만은 조금도 변해있지 않았다.

바로 그녀가
얼마 전
그녀의 친구인 신詩人과
출판기념회를 다녀오는 길이라며 찾아왔다.

신詩人은 시를 쓰지만
그녀는 동양화를 즐겨 그린다.

셋이 맥주를 마시면 우린
서로의 가슴에다
시와 그림을 그렸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늘 그런 것이었는데
이번에....
느닷없이
신시인의 돌발질문이 튕겨져 나왔다.

Y(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황당했다.
신詩人은 내게
질문을 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떤 한가지의 정답을 말하기를 강요하는 눈빛이었다.

그것은..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으로부터 아주 먼 대답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긴...
술 친구지.....

돈 없으면
슈퍼에서 소주 한병 사서
아무 골목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새우깡을 안주 삼아
함께 잔을 나누어도 마다하지 않는
편안한 술 친구지....

에이...
하며 신시인은 강한 부정을 표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맞아맞아..우린
그런 술 팅구지...
하며 밝게 웃었다.

누구보다도
고고함을 사랑하고
남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 보여주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그녀인데도

맥주 3병에 마른 안주 한 접시...
그 기본이 10000원...
이런 곳을 발견해 내곤
한없이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녀....

그녀가
처음부터 그렇게 편했나?
그건 아니야..


접근하기 나름이지...

그녀와 이웃하고 사는 바로 옆집 사람도
그녀가 무슨 이유로 외출을 하는지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그녀가...

막걸리 풀풀 흘리며 마셔
검은 옷깃에
희끗희끗 얼룩이 져도
내 앞에서만은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

그녀도 나를
좋은 술친구로 생각하겠지?

' 단상록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과 인연  (0) 2005.09.01
죽음이라는 희망  (0) 2005.08.31
그녀--6  (0) 2005.08.31
그녀--5  (0) 2005.08.31
그녀--4  (0) 2005.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