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1

그녀--9

末人 2005. 10. 26. 09:21
그녀를 알게 된 건
순전히 막걸리 때문이었다.

허전한 마음과
빈 듯한 뱃속을 채우는 데에는
막걸리만한 음식(?)도 드물다.

촐촐함이 느껴지는 해질 녁
골목을 걸어가던 나에게 빈대떡집이 눈에 띄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찾아들어
예의 그 파란 통의 설막걸리를 시켜 마셨다.

두어평이나 될런지
작은 공간에는 사각테이블이 두개정도 놓여 있었고
손님은 오직 나 뿐이었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빈대떡을 부쳐내오는 그녀를
앞자리에 주저 앉히고
술잔을 나누었다.

서글서글한 용모에
지적인 음성
그리고 정확한 어휘를 구사하는 태도가 맘에 들었다.

화제는 등산 쪽으로 흘러갔고
그녀 또한 간간히 산을 즐기는 여인이었음을 알았다.

그로부터 나는 그 집을 비교적 자주 갔다.
나의 선전에 끌려
오래된 우리 도관님들 중엔 한번 쯤은 그 곳을 들려본
회원들이 더러 있다.

추석 전
우연히 그 곳을 들렀다가
아차산 달맞이 산행이야기가 나왔다.
시간되면 함께 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렸다.

그리고 이틀 후
아무 생각없이 아차산 입구를 지나 한 고개를 넘어서려는데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일순
그녀와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함께 산행을 하고
하산 후 일잔을 함께 나누는 동안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 몇가지를 알게 되었다.

별거중이라는 것과
두 아들의 엄마라는 것과
부동산업을 하다가 실패 후
이런 직업을 호구지책으로 택해서 하고 있다는 것과
지금도 가끔
한라운딩을 위하여
그린피 20만원정도씩을 지출한다는 여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 이름을 좔좔 읊어대는 여인
훤칠한 키에 걸맞게
학창시절에 배구선수를 했다는 여인...

그러면서도
지금의 자기 직업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사는
주관이 뚜렷한 그녀...

이번 겨울을 끝으로
자신의 능력보다 두단계 아래의 지금 직업을 버리고
한결 업그래이드 된 업종을 찾아
멋지게 도약해 보겠다는 포부를 말해주는 그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자기 것으로 당당히 받아드릴 줄 아는
그녀가
아름다와 보였다.

보다 안정된 직업을 갖게 되는 그날
우리 도관방에 가입하겠다던 그녀의 약속을 받아내며
나도
그 날까지 열심히 까페의 존속을 위하여
힘을 다 하겠노라고 답해 주었다.

퇴근 길에
가볍게 한잔 할 수 있는 그 집...

리베로님도
꼭 한번 찾아 가겠노라 약속하고
그녀와
함께한 짧은 시간을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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