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1

[스크랩] 홀로 산행기

末人 2007. 10. 31. 21:00
홀로 산행


대단한 산을 가는 것만이 산행의 전부는 아니리..(자위)
거의 한달에 가까운 동안
근육파열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그 좋아하던 산행을 못하고 갑갑함 속에서 지낸
악몽같은 시간을
오늘은 기필코 털어내리라 마음먹고 산으로 향했다.

그동안 여러 병원을 다니며
물리치료에 침에 뜸에 주사에 약물요법까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뒷 종아리 한복판에 주먹막한 통증 덩어리가
발자욱을 뗄 적마다 왔다리 갔다리 하며
여간 불편을 주지 않았었는데
다행히도 한의사인 유비 친구의 침 한방에
모든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진 덕에
자신을 갖고 산을 찾을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나의 오랫만의 등정을 환영이라도 하려는 듯
함박에 가까운 눈이 펑펑 뿌려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은
높은 산은 무리일 것 같아
나즈막한 동네 산인 아차산을 찾았다.
간단한 행동식을 준비하고 층층이 쌓인 계단을 올라
군데군데 박혀있는 암릉 지대를 지나
팔각정 바로 아래까지 단숨에 올라본다.
어~?
이것 봐라!!
나도 내 자신에 놀랐다.
멀쩡하다.
다리야~! 고마워-
허지만 조심해야지.
팔각정 안에서 아이젠을 착용하는 여는 사람들처럼
나도 아이젠을 장착하고 눈길로 나섰다.
많은 산행인들로 인하여 반들거리는 눈길에
아이젠을 차고 나서니 마음 든든하기 그지없다.
하이얀 눈발은 사정없이 날리고
희뿌연 눈발 사이로 도회지의 잿빛 모습들이 어렴풋이 내려다 보인다.
낮은 소나무 가지마다 탐스런 눈꽃들이 소복소복 피어있고
오랜동안 찾지 못했던 겨울 산이
나를 반가이 맞으려는 듯 온통 하이얀 드레스를 걸쳐입고 환영한다.
봄이 되면
시린 만큼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겠지.
지금 이 눈발 속에서
가지들은
그 봄에 피울 꽃의 형태를
이 겨울 미리 피워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빗속도 걸어 보았고
퍼붓는 폭양 속에서도 걸어 보았고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걸어 보았지만
이렇게 펑펑 함박눈 쏟아지는 아름다운 눈길 산행은 처음이다.

아!
혼자이기에 안타깝다.
혼자이기에 깊은 생각은 할 수 있어 좋지만
혼자이기에
펼쳐진 이 장관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외롭다.
기울어가는 삶의 저녁에
마음맞는 벗과 더불어
한없는 시간동안 함께 담소할 벗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누군가에게
이 순백의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싶은데
아무도 없다.
저 멀리 광나루로 구비쳐 내려오는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
나무 벤치에 잠시 앉아본다.
몇마리의 비들기들이
목을 잔뜩 움추린 체 눈속에 서성이고 있다.
인심좋게 생긴 생면부지의 한 여인이 불현듯
커피 한잔을 권해 온다.
그니의 마음 만큼이나 따뜻한 커피가
온몸에 퍼져든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또 걸어 본다.
여기저기서 아이젠을 착용치 않은 이들이 픽픽 쓰러진다.
여차하면 한잔 하리라 마음먹고 담아간 팩소주가 있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한참을 걸어 최종 목적지인 헬기장의 나무벤치에 앉아
베낭 속에서 가져간 두유 한잔을 따라 마신다.
잔 속으로 날아드는 눈발까지 함께 마신다.
혼자 이러고 있자니
처량도 하고 내 자신에게 측은한 마음도 들고
허지만
모처럼 갖는 혼지만의 시간이라
마음도 가볍고 생각도 가볍다.
조각조각 부숴져 날리는 허공 속의 눈발이 자꾸만
시선을 잡는다.
볼펜이라도 꺼내
시 한수 적는 궁상이라도 떨고 싶었지만
보고 있는 이 순간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습을
그 무슨 단어로 그려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돌아가
눈을 감고 조용히 회상하며 써 봐야지.
눈 오는날 커피 한잔해요라는 그니가 문득 생각났다.
핸펀의 숫자를 눌러본다.
두유마시고 쩝쩍대는 입으로
전화통화하긴 싫었다.
정말 좋아요....
들려오는 목소리...
그래,
이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어디있겠는가?
정말 좋은 모습이다.
터덜터덜 다시 걷는다.
한 패거리의 젊은 이들이
눈을 뭉쳐 던지고 받는 사이를
그들로 인하여 넘어질까봐 몸을 사리며
그들로 부터 벗어나서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 산을 내려 왔다.
아이젠을 벗고
다리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이래저래 마음 흡족해 걷는 순간
꽈당
한방에 발라당 뒤로 미끌어져 넘어진다.
어이쿠~!
큰 울림으로 쏴하게 느껴져오는 엉덩이 통증...
허나
그것도 일순간..
풀어져 있던 온몸 근육을 자극시킨 그 엉덩방아로 인하여
몸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져 왔다.
이제는 다시
열심히 산행을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좋은 날
좋은 몸으로 다시 돌아온 기념으로
새벽 한시까지 퍼마시다 들어왔다.


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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