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1

[스크랩] 그 해 가을

末人 2007. 9. 8. 13:24

늦가을
캠퍼스의 운동장
나무 벤치 뒤
울타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마다
노오랗게 물든 잎새들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매달려 있었다.
그는 공학관 건물을 빠져 나와
호수 쪽으로 걸었다.
오늘은 용기를 내야지..
호수 위를 한가롭게 떠다니는 물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담배를 불부쳐 물었다,
지난 시간 속에서
그의 가슴 깊이 들어와 있는 그녀를 생각했다.

이제는 그녀 없이는
무엇이고 아무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늘 마음 안에만 담아 두고 하지 못했던 말을 오늘엔
기어코 하고 말리라..

"오래 기다렸어?"
어느 사이
그녀가 그의 곁에 다가와 환히 웃고 있었다.
"아니... 얼마 안 기다렸어..."

그는 잠시 당황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듯 하여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기 시작함을 느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안색이 별로 안좋네?"
그녀가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했다.
"아...아니.. 고민은 무슨..."
그는 순간 당황했다.
"걷자"

그는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호수 위로 노오란 은행잎들이 날아와 앉는다.

천천히 호수를 따라 걷던 그는
오늘은 기어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작심했다.

"자애야.."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애야,우리 결혼하자."
"응? 뭐라구? 다시 말해봐"
흠칫 놀라는 그녀를 봤다.
"결혼하지구..."
"뭐?  뭐라구? "
그녀는 다시 한번 놀랐다.
말을 해 버렸지만
후련하기 보다는 당황해하는 그녀의 표정이 영 안스럽게만 느껴졌다.

"나 갈래.."
그녀는 화가났는지 당황했는지
빨리 그의 곁을 벗어나려는 듯 걸음을 옮기려했다.
 그러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물론 느닷없는 내 얘기에 충격받았을 줄 안다.
당장 답 안해줘도 좋아.
허지만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그러면서 그는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서
핑크빛 분필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대답을 기다릴게.
내 청혼을 받아준다면 O
거절한다면 X 를
다음 주 토요일 오후 4시까지
교문 오른 쪽에 써 놓아 주길 바래."

그녀는 빨리 그로부터 벗어나고픈지
내민 분필을 받아 쥐고는 황급히 뛰어가듯 가버렸다.

충격이 컸나보다.
허지만
언제까지고 그녀와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쯤 겪고 넘어갈 일을 오늘 했을 뿐이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주었으니
어떤 대답이 올지 그도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그와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편했던 둘 사이가
그의 그런 행동으로 인하여
거북스러워졌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흐르고
캠퍼스엔 더욱 깊은 가을이 흐르고 있었다.

살면서 그에겐 기다리는 이 일주일이 가장 길었던 순간이 되었다.
기다리는 일주일동안
그는 온통 그녀 생각만을 채워야했다.

운명의 토요일은 오고
시간은 더 이상 기다리질 않고
결정의 순간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천천히 캠퍼스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진정되지 않은 가슴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천천히 정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아무런 표시도 보이질 않았다.
어이된 일인가?
어? 어이된 일이지?
그는 정문 오른쪽을 위에서 아래로 유심히 훑어 내려갔다
그러던 순간
그는 학교 이름이 새겨진 제일 아랫쪽에
아주 작게 써있는
분홍색 분필 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O도 아니고 X 도 아닌 △ 표시였다.
△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그 때부터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보인가?
완곡한 거절인가?

삼각형의 고민은 시작되었지만
그녀를 만나고 대답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해명도
들을 수는 없었다.

계절은
은행나무로부터 모든 잎새들을 훑어가 버렸고
황량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 지나고
다시 은행나무에 파릇한 새순이 돋을 때까지도
그는
그녀로부터 어떠한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삼각형을 그려준 그녀가
해마다 가을이 오면
아린 아픔이되어 떠오른다는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출처 : 그 해 가을
글쓴이 : 말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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