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다
만만하게만 생각했던 날씨였는데...
둥지를 벗어난지 채 오분도 되기 전에
겨울의 호된 질책이 시작되었다.
귀때기는 차갑게 굳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볼때기엔 차가운 냉기가 덮어왔고
입술마저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미리 가서 떨 것인가
6분 늦게 가서 따가운 시선을 받을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주최측(?)의 농간이 다분히 포함되지 않았다 아니할 수 없다.
애시당초
이런 고민을 안겨준 건 순전히 열차 시간표 속에 숨겨져 있었다.
약속된 10시 30분에
바로 그 자리 회룡역 2번출구에 나타나려면
10시16분에 도착하는 앞 열차를 타던지
10시36분에 도착하는 바로 뒷 열차를 타던지
선택은 단 두개 뿐이었으니깐.....
대다수의 회원들이 바로 이 트릭에 말려
10여분 이상 먼저 도착해서 떨고 있던지
아니면 6분 지각하는 사태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거기서 그쳤던가?
약속된 2번 출구를 가려던 발길은
셀파지기님의 출구 앞 납치 전략에 휘둘려 모두 멈춰서야만 했고
결국은 모두 3번 출구로 빠져나오고야 말았다.
꿋꿋한 단 한 분...
이마야님만이 우직하게도 2번 출구 앞에서
잘 만들어진 약밥과
차지고 고소한 인절미를 뒷잔등에 무겁게 걸머진 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빈 공간을
초조와 불안... 의구심과 기다림으로 지키고 있어야 했다.
직선도로를 피하여
이마야님 쪽으로 빙 둘러가는 길을 선택한 건
그 초조한 기다림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으리....
열여섯 사패산 등정대는 그렇게 어렵게 모여져
회룡골로 비로서 들어설 수 있었다.
회룡사로 오르는 게곡엔
흐르기를 멈춘 계류들이
우람한 빙벽의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집을 나서던 그 순간의 차갑던 냉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사패로 오르는 길은 장갑을 벗어도 될만큼 포근했다.
내려 오는대로 녹지도 못한 눈들이
모두 쌓여있어
길목마다 산허리마다 하이얀 설원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젠 밑에서
얼어붙은 겨울은
끊임없이 뽀드득 거리며 뽀개지고 있었다.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대지를 뒤덮은 저 차가운 겨울덩어리들을 쉽게 뽀개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짜증나는 세속의 온갖 번민들을
바로 이 발아래 눕혀놓고
이렇게 빠득빠득 짓밟아 부숴버리는거야....
빠득이면 어쩌고 뽀득이면 어쩌리..
소리따라 오르니 어느덧 능선길..
바람이 차다..
송추골을 타고 오르는 북서풍이 제법 차다...
뭔 일을 그리 많이 했다고
어김없이 때를 알리는 배꼽시계가 벌써 점심을 재촉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열여섯명이 편안히 앉을만한 공간을 찾아 걷는 동안에도
민중은 기아에 허덕이며 밥 빨리 먹자고 보채댄다...
그나마 찾은 한평 남짓한 빈터에 자리를 깔았다.
포항 앞바다의 문어가 꾸물거리며 모님의 베낭 속에서 기어 나온다.
영산강 겟벌을 박차고 장어도 멋진 양념장을 걸치고 등장한다.
동해바다를 활보하던 꽁치가
버너 위 코펠 안에서 온탕을 즐기고 있다
논산 비닐하우스를 찢고
빨갛고 탐스런 딸기도 등장한다.
꼬막도 벌교 갯벌을 벗어나 사패의 눈밭 위로 스믈스믈 기어나온다.
이마야표 약밥이 그님의 손끝을 타고 어느덧 이몸의 입까지 다다른다.
지평막걸리도 나오고
해맑은 양주도 취기를 재촉한다.
하이얀 눈발 위에서
햇살은 파편처럼 부숴져 내렸고
열여섯이 만들어내는 즐거움은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의정부 시가지의 상공을 넘어 수락산 저너머까지 날아간다.
사패산 정상엔 바람이 없었다.
푸른 창공과 맞닿은 사패정상....
우리는 드디어 완전히 사패의 한가운데에 스며들었다.
저마다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햇살이 되었다.
사패의 정상 위에서
모두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다.
노래소리는 사패능선을 타고올라
저 멀리 도봉산 포대를 넘어 봉긋이 솟아오른 오봉을 넘는다.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를 지나
우리들의 노래는 하늘이 된다.
전기료가 오르던 말던
북한이 핵실험을 하던말던
정권말기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하던지말던지...
우리는 그냥 산이 좋아 올랐고
올랐기에 즐거웠고
즐거웠기에
그 모든 속세의 일들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이제 우리는 내려갈 것이고
또다른 즐거움인 뒤푸리를 할 것이고
그리고 다시뿔뿔히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만들어 준 오늘의 이 즐거움이야
어디 뿔뿔히 흩어지기야 하겠는가?
내려오며
남은 모든 먹거리를 정리하는 동안
홀연히
아니 안개처럼 사라진 채연님의 종적을 찾아
부지런히 하산을 해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는 없었다.
발자국을 남길 수 없을 만치
수많은 이들이 벌써 지나간 눈쌓인 산길을 내려오며
우리는 또다시
어느 산의
아름다운 노래가 될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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