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짙은 어둠이 깔린 고갯길...
비는
하염없이 뿌리고 있었고
우리는 어두운 고개에 내렸다.
그 언젠가
친구 녀석들과 망우리 공동묘지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묘비에 적혀있는 저마다의 삶을 읽어 보려고
온 산을 쏴 다닌 적이 있었다.
지금도 문정 당시의 문우 강무는(서예가)
시간만 나면 망우리 공동묘지를 훑는다고 했다.
그 곳에 묻혀있는
유명을 달리한 시인들의 초라한 무덤을 찾아가
묘비문도 살펴보고
위치도 알아내어 한국문학사적 의미로
언젠가
후세에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제명을 못 살고 어린 나이에 죽은 영혼,
먼저 간 아내를 기리는
남아있는 남편의 처절한 노래..
묘비는 저마다의 사연을 말해주는 표석이다.
그 해 가을에
나는 묘비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잘 곳 없는 초라한 무덤에
죽은 이의 이름도
남아있는 가족의 이름도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묘비에
적혀있는 여덟글자를 읽었다.
내 사랑 여기 잠들다.
그게 다 였다.
순간
나는
결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나의 연인을
이 곳에 묻기로 했다.
아무 데고 갈 수가 없게
조금도 마음이 변할 수 없게,
영원히 영원히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나는
나 혼자만이 찾아와 볼 수 있는 이곳에
그녀를 영원히 잠재우기로 했다
내가 늘 부르고 사용하던 가상의 연인 자애~!
내 소설 속에 어김없이 등장하여
내 사랑을 무조건 받아 주던 여인 자애~!
그 날 부터 그 무덤은 자애의 무덤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마음이 허전하던가
고독이 온몸을 덮어올 때면
가끔
이 무덤을 혼자 찾아와
한참동안 앉아 있다 가곤 했었다.
오늘
그니와 바로 그 자애의 무덤을 가기 위하여
이 비내리는 밤에 온 것이다.
올라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고즈녁한 정적을 깨는 밤,
검은 정적만이 흐르고 있는 산 허리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 봤다고
나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단 말인가?
순간 나를 믿어주는 그녀에게
나도 모를 연민의 정을 느꼈다.
입고 있는 군복의 어깨 위로
소리없이 내려 앉는 빗줄기가
등허리까지 파고들어 번져
살갗을 타고 흘러 내려 오고 있었다.
한참을 아무 말없이
희미한 윤곽으로 보여지는 산길을 따라
어둠의 뭉치처럼,
또는
검은 덩어리처럼 늘어서 있는
공동묘지가 즐비한 산을 올랐다.
한참을 올랐다.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곳까지 왔다.
우리는 나무가지 아래로 비를 피해 멈춰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만 갈까요?
다음에 가요....
내가 먼저 올라가길 포기했다.
도저히
그 곳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내 말을 듣고 잇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무 잎파리에 묻어있던
한웅큼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순간
추위가 엄습해 왔다.
나는
빗줄기에 노출되어 있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머리 위의 군모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내 시야 가득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향기가 났다.
너무도 향기롭고 황홀한 향기가
내 뜨거워진 가슴 속 깊이까지 밀려 들어왔다.
그녀의 숨소리를 그치게 하려는 듯
힘있게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아니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새로 터져 분출을 시작한 활화산의
뜨거운 용암을
나는 내 삭막한 빈 가슴으로 모두모두 받아 마시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도
이 외로운 시간 위에서
기대고 매달 릴 곳은 나 밖에 없었다.
흐느끼는 듯
가벼운 신음이 들렸다.
추위는 언제 사라졌는지도 몰랐다.
비가 오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커다란 어둠의 덩치를 기대고 서서
그녀도
목마른 사슴처럼
긴 목을 빼어들고
울부짖는 나의 신음을
사정없이 마셔대고 있었다.
.....
.......
걸었다.
도회지의 밤을 수놓던 네온불빛도
하나 둘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일 이사 간다고...
나는 그의 주소를 성냥곽 밑바닥에 받아 적었다.
그녀의 주소가 적힌 성냥곽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날로 부터 닷새 정도 지나서 였다.
다음 날
휴가를 마치고 귀대를 했고
나는
귀대하던 날 제대 특명을 받고
공교롭게도 그 날 제대를 했다,
제대 수속을 밟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내가
얼마 후 그녀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보낼 수가 없었다.
주소가 없었다.
그녀 또한
부대로 편지를 보냈을 터인데
그 곳엔 내가 없었으니...
우리의 인연은
단 하루였다.
그로부터
나는 그녀 생각에 오랜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생각만 해도 잠자던 가슴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듯 했다.
단 하루였을 뿐인데..
이렇게 그립단 말인가?
사랑이었을까?
욕망이었을까?
지금도 알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
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잠시
번개처럼 스쳐가던 인연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내가 몸으로 쓴
또 하나의 꽁트였다.
또 한번의 좌절이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어 갔다.
고독이 성글성글
온 몸에 매달려 다니며
나를 괴롭힐 즈음
나에겐
또 하나의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보다 더욱 고독해 보이던 여인~!
눈물로 보내야 했던
또 하나의 이별을 위하여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시작하고 있었다.
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
글쓴이 : 末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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