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2

[스크랩] (말인의)청춘을 돌려다오- 3 (래빈더와 마로니에1)

末人 2006. 5. 16. 16:07
(래빈더와 마로니에)-1

1969년
12월 초순
절친한 친구 Y군을 꼬드겨
한 겨울이 마악 시작되는 강릉 바다를 찾았다.
20대에 갓 접어든
아직 군대도 못간 젊은 나이
그러했기에
꿈도 많았고 야망도 많았다.

초고를 잡고
수정을 여러번 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200자 원고지 70매 정도에
옮기는 작업을 위하여
내 깐에는
고시공부 하는 이들이 절깐을 찾아들 듯
나는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응모키 위하여
조용한 강릉 바닷가 민박을 찾아간 것이었다.

시내 변두리의 한가한 목조건물 2층
낡은 LP판에서는
FOREVER WITH YOU 가 흘러나왔다.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테너쌕스폰의 멜로디..
나는 그 음악을 무진장 좋아했다.

듣고 또 듣고
서울서 내려왔다는 눈이 맑고 키가 컸던
그 다방아가씨와
무려 7잔의 커피를 마시며
계속계속 그 음악을 들었다.

만취와 커피,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과
항상 먼 허공을 보며 사색에 젖는 것으로
젊음의 멋을 추구하던 때...
그렇게 앉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다가 실증이 나면
아무도 없는 텅빈 겨울 바닷가를 걸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그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 가득 밀려오는 그 어떤 그리움에
젖어들곤 했다.

강릉으로 내려오기 얼마전
한 여인으로부터 한통의 엽서를 받았었다.

님이 쓴
하얀이슬과
소라글씨를 잘 읽었노라는
늘 받고있는 일종의 팬레터였는데
편지지를 접은 모습이
너무도 특이했기에 기억에 담고 있었다.

문득 그날
그녀에게 짧은 답신을 한 통 띄웠다.
봉투엔
작은 조개껍질도 하나 넣어서 보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그 해 성탄절날 아침
나는
그녀가 보내 준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
카키색 봉투 안에는
고급 만년필 한자루와
하이얀 원고지 500장이 들어 있었다.

글 쓰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고 싶다는
짧은 멧세지와 함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며칠 후
그녀로 부터 답신이 왔다.

단 네글자...



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눈이 내리면 만나자는 약속을 해 놓고 있던 바로 그 어느 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 날이다.

(이하 지난 번 까페에 올렸던 내용)

정오가 가까와지자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점퍼의 깃을 바짝 세우고 덕수궁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오른 손에 신문을 들고 기다리겠노라 약속했기에
손이 시리지만 신문을 뚤뚤 말아 거머 쥐고 서 있었다.

세모를 앞둔 거리는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린다.
연방 팔뚝에 찬 오리엔트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윽고 12시 정각이다.

그러나 아무도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순간 나는 당혹스러움과 허탈감에
갓 배운 담배를 불부쳐 물었다.
가느다란 스포츠라는 담배.....
담배연기를 한모금 길게 내 뿜으며 무심코 연기를 쫓아 시선을 돌렸다.

순간
정문 옆
정동 쪽으로 들어가는 돌담길 입구에
한 여인이 수줍은 듯 서서 내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저니다.
저니가 분명하다.

순간 직감적으로 그니가 Y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용기가 샘솟으며
나는 그니의 검은 판타롱위에 걸쳐진 감색 코트를 향해 다가갔다.

그니가 부끄러운 듯 얼굴 가득 홍조를 띠며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가 가기는 선뜻 했지만
막상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저......
저... Y님 아니신지요?

대답대신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나도 그니를 똑바로 바라보지를 못했다.

어깨를 타고 넘어
등허리까지 흘러내린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만이 눈에 들어왔다.

가시죠....

먼저 발길을 옮겼다.
덕수궁 정문 쪽으로 약속이나 한 듯...
대한문을 통과해서 내가 먼저 들어서자
그니도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꽃무늬가 그려진 그녀의 스카프 위로
하얀 눈은 하염없이 내려앉고 잇었다.

궁 안은 비교적 한적했다.
그때까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한마디도 던지질 안았다.
아니 던질 말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데이트라는 걸 해보지 않은 터에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할지 정말 몰랐다.

그렇게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앞과 뒤에서 떨어진 체
한동안 묵묵히 걷기만 했다.

생각같아서는
학생이냐? 직장인이냐?
무얼 좋아하느냐?
영화 감상이라도 할테냐?
점심은 들었느냐?
무얼 먹겠느냐 등등
던지고픈 말들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색할 것만 같았다.
그니가 뭐라고 먼저 말이라도 부쳐주면 좋으련만
그니도
천천히 쌓여가는 눈 위에
발자욱만 찍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뭐라고라도 말을 해야만 했다.
용기를 내자
아니
용기라기 보담은
그냥 눈 딱 감고 말을 하자.
그러는 내가 싫다면 다음에 안만나면 되지 뭐...

저...
눈 좋아하세요?

........

대답대신 그냥 웃기만 하는 그니.


저....
덕수궁은 자주 와 보셨어요?

........

역시 대답이 없다.
순간 나는 약간의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혹시 벙어리?
그럴리가...

아참,
선물 잘 받았어요.
웬걸 그리 많이 보내 주셨어요?

어머,
벌써 받으셨어요?

처음으로 들어본 그녀의 목소리였다.
얼굴 가득 만들어 보이는 미소가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처음으로 대한 그녀였지만
상당히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생각됐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내자
비로서 말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살아났다.

신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주고 받으며
우린
석조전까지 걸어갔다.

공원목들이 내린 눈으로 인하여
모두 하얗고 두꺼운 눈 옷들을 입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의 속도를 늦춰
보다 가까운 폭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걸었다.

그녀도 거부하지 않았다.
이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숨소리를 느끼며 걸었다.


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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