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인이 부르는) 청춘을 돌려다오-첫번째 이야기
(서언)
이왕지사
서래옥이 내 이야기를 꺼내다 말았으니
이왕 하려면 화끈하게 몽땅 다 쏟아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본래
맛보기가 더 맛있는 법은 법인데
사람심리가 어디 그런가?
맛을 보면 그저 그 음식 몽땅 다 먹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이치다.
하여
오늘부터 몇차례에 걸쳐
잘은 못 부르지만
말인이 나훈아가 되어
청춘을 돌려달라고 꽥꽥 소리를 질러 보겠다.
1,
누구나 다
요란하고 아기자기하고
불타면서도 화끈한
젊은 날의 추억이 있겠지만
이제부터 말하려는 나의 청춘은
오직 나만이 겪은 나만의 청춘이기에
한번 쯤 들어봐도 괜찮치 않지 않겠는가?
(수학적으로 x가 셋인데 마지막을 ?로 끝냈으니 결국은 긍정이 됨)
1969년 12월
한 해가 마악 저물어 가던 28일
나는
한통의 초청 엽서를 받고 종로2가
청암다실이라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더부룩히 귀를 덮은
반곱슬의 장발은
이발 하기를 유난히 싫어했던 나에겐
어느덧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날도
자꾸만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두 손가락을 빗처럼 만들어 쓸어 올리며
청암다실로 향했다.
청암다실은
동아방송의
세시의 다이알이라는 팝송프로를 진행하던
최동욱씨가 직접 나와
전자 올겐을 쳐주며
신청곡을 받아주던 분위기 있는 음악다실이었다.
아직
올겐 연주는 시작 되지 않았다.
핸섬한 사내가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나보다 5년이나 연배인 운파형이었다.
"아, 이경씨..반갑습니다."
훗날
대중가요 작사가로써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던가 칠갑산,백지로 보낸편지 등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조운파,
본명은 조대원으로써 충청도 사나이였다.
문학동인회를 만들자고 만나는 첫날이었다.
그 자리엔
석초(시인등단),곡두,박석수(시인등단),김준현(시조시인등단)등등
모두 10명이 모였다.
곡두와 내가 막내였다.
모임명칭을 문정문학으로 정하고
제1회 시화전을 국립공보관에서 치르기로 합의하고
동인지 출간을 서둘렀다.
편집을 맡은 나는 그날부터 그들의 원고를 수집하여
동인지 발간에 온 힘을 쏟았다.
모두
주간한국 독자란을 통하여 만난 우리들이었다.
아무리 독자란이지만
그 곳에 글 올린다는 것은
어찌나 경쟁이 치열한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도
우리 10명은
그 곳을 섭렵하는 단골 기고가들이었던 것이었다.
원고지 두장 분량의 짧은 꽁트를 매주 지어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문학에 취미를 가진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공간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던 시절이었다.
몇 개 안되는 문학잡지에 등단하던지
아니면 매년 초
각 일간지에서 모집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던지
정말로 발표할 곳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간지 독자란은 유일한 발표무대가 되어 주었다.
운파,곡두,말인,박석수는 꽁트를
석초,경암,은 주로 시를 투고했다.
한번 글이 실리면
전국적으로 펜레터가 수백통씩 날아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스타였다.
한국일보사의 주간부 서인태부장님,
정홍택 차장님의 각별한 관심에 힘입어
우리는 승승장구
문학에의 열정을 나름대로 쏟을 수 있었다.
대충 첫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무교동 뒷골목 학사주점에서
걸쭉한 막걸리로 삶의 갈증을 풀었다.
간첩단 사건으로 폐장되었던 학사주점이
무교동 뒷골목에 초라하게 문을 열고 있을 때였다.
이날 첫모임엔
2명의 여성회원도 있었다
윤금자,그리고 k녀.
이 날로부터 시작된 이들과의 인연...
그리고
이날을 기폭제로 하여
만나게 되는 기라성같은 기인들과의 만남....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엄청난 변화를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된다.
계속할까? 말까?
(물론 여기에 서래옥도 등장하고
제강도 등장한다)
(서언)
이왕지사
서래옥이 내 이야기를 꺼내다 말았으니
이왕 하려면 화끈하게 몽땅 다 쏟아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본래
맛보기가 더 맛있는 법은 법인데
사람심리가 어디 그런가?
맛을 보면 그저 그 음식 몽땅 다 먹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이치다.
하여
오늘부터 몇차례에 걸쳐
잘은 못 부르지만
말인이 나훈아가 되어
청춘을 돌려달라고 꽥꽥 소리를 질러 보겠다.
1,
누구나 다
요란하고 아기자기하고
불타면서도 화끈한
젊은 날의 추억이 있겠지만
이제부터 말하려는 나의 청춘은
오직 나만이 겪은 나만의 청춘이기에
한번 쯤 들어봐도 괜찮치 않지 않겠는가?
(수학적으로 x가 셋인데 마지막을 ?로 끝냈으니 결국은 긍정이 됨)
1969년 12월
한 해가 마악 저물어 가던 28일
나는
한통의 초청 엽서를 받고 종로2가
청암다실이라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더부룩히 귀를 덮은
반곱슬의 장발은
이발 하기를 유난히 싫어했던 나에겐
어느덧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날도
자꾸만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두 손가락을 빗처럼 만들어 쓸어 올리며
청암다실로 향했다.
청암다실은
동아방송의
세시의 다이알이라는 팝송프로를 진행하던
최동욱씨가 직접 나와
전자 올겐을 쳐주며
신청곡을 받아주던 분위기 있는 음악다실이었다.
아직
올겐 연주는 시작 되지 않았다.
핸섬한 사내가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나보다 5년이나 연배인 운파형이었다.
"아, 이경씨..반갑습니다."
훗날
대중가요 작사가로써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던가 칠갑산,백지로 보낸편지 등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조운파,
본명은 조대원으로써 충청도 사나이였다.
문학동인회를 만들자고 만나는 첫날이었다.
그 자리엔
석초(시인등단),곡두,박석수(시인등단),김준현(시조시인등단)등등
모두 10명이 모였다.
곡두와 내가 막내였다.
모임명칭을 문정문학으로 정하고
제1회 시화전을 국립공보관에서 치르기로 합의하고
동인지 출간을 서둘렀다.
편집을 맡은 나는 그날부터 그들의 원고를 수집하여
동인지 발간에 온 힘을 쏟았다.
모두
주간한국 독자란을 통하여 만난 우리들이었다.
아무리 독자란이지만
그 곳에 글 올린다는 것은
어찌나 경쟁이 치열한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도
우리 10명은
그 곳을 섭렵하는 단골 기고가들이었던 것이었다.
원고지 두장 분량의 짧은 꽁트를 매주 지어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문학에 취미를 가진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공간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던 시절이었다.
몇 개 안되는 문학잡지에 등단하던지
아니면 매년 초
각 일간지에서 모집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던지
정말로 발표할 곳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간지 독자란은 유일한 발표무대가 되어 주었다.
운파,곡두,말인,박석수는 꽁트를
석초,경암,은 주로 시를 투고했다.
한번 글이 실리면
전국적으로 펜레터가 수백통씩 날아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스타였다.
한국일보사의 주간부 서인태부장님,
정홍택 차장님의 각별한 관심에 힘입어
우리는 승승장구
문학에의 열정을 나름대로 쏟을 수 있었다.
대충 첫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무교동 뒷골목 학사주점에서
걸쭉한 막걸리로 삶의 갈증을 풀었다.
간첩단 사건으로 폐장되었던 학사주점이
무교동 뒷골목에 초라하게 문을 열고 있을 때였다.
이날 첫모임엔
2명의 여성회원도 있었다
윤금자,그리고 k녀.
이 날로부터 시작된 이들과의 인연...
그리고
이날을 기폭제로 하여
만나게 되는 기라성같은 기인들과의 만남....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엄청난 변화를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된다.
계속할까? 말까?
(물론 여기에 서래옥도 등장하고
제강도 등장한다)
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
글쓴이 : 末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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