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파)
운파형은 당찬 면이 많았다.
국립공보관의 전시실을 빌리러 갔을 때
공인된 모임이 아니면 장소를 내 줄 수 없다는 데도
그는
한국문인협회 문정문학동인이라고 큰 소리쳐서
결국 국내 최대이자 유일의 국립공보관을 빌리 수 있었던 거다.
시화전은 그 후
내가 군에 입대하던 7월 다음 달인 8월에 열렸다.
화가 김덕춘과
윤금자가 그림을 맡았고
우리는 시만 춤품을 했다.
물론
후원은 한국일보사였다.
나는 참석은 못했지만
나름대로 성황리에 마쳤다는 거였다.
술은 잘 못마시는 운파형이었지만
그를 무던히도 잘 따르던 여인이 있었다.
강원도 영월인가에서
끈질기게 날아오는 편지의 주인공-옥경이였다.
그는 늘
베일 속에 가려져 사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옥경이 만큼은 늘 오픈해서 보여 주었다.
품고 다니는 사진도,
받은 편지도...
그러나
그는 사생활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우리들 중엔
그가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이나 있다느니
아니면 이혼을 했다느니
추측만이 분분했다.
그가 휘갈기는 글은
힘이 있었다.
사물을 표현하는 기법이 무척 예리했다.
그러나 그도 운이 없었다.
글쓰기 실력이래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나 나나 우린 운이 되게도 없었다.
나도 한두번 떨어진 기억이 있는 신춘문예..
주간지 뒷장 독자란에나
글 몇자 끄적여 올리는 것으로
울분과 욕구를 풀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었다.
학원이라는 전국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발간되던
국내 유일의 청소년 잡지에
6개월 동안 써서
장편소설(200자 원고지 1800매 분량) :어둠이 깃드는 해변"을 투고했다가
멋있게 떨어진 이후로
추리소설을 쓰겠다고 껍적대다가
그도 신통치 않자
아예
창작과 비평을 통하여 혜성처럼 등단한
분례기의 방영웅처럼
나도
무언가 큰 거를 한번 터트려 보자는 욕심에
대하 장편을 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을 때였다.
목표는 경향신문이었고
주제는 장돌뱅이 이야기였다.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고장난 삶을 사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운파가 가장 좋아하던 주제가 바로 고장이었다.
10명의 문학도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운파형은
자연히 내가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화신백화점 건너편에
신신백화점이라고 있었고
그 신신백화점 뒷골목에
어느날 운파가 뚱딴지같이
한식집을 차렸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가서 문을 닫았다.
지금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왜 갑짜기 식당을 차렸고
왜 황급히 문을 닫았는지..
운파는
시간만 나면 회원들의 집을 불시에 찾아가곤 했다.
그가 나의 비좁은 단칸방을 찾아 온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대낮부터 찾아와
방 안 한 복판에
큰 대짜로 누워
한참씩 잠을 이루다 가곤 했다.
한잔만 마셔도 온 몸이 붉어지는 체질인지라
술은 도통 못마셨지만
석초를 만나면 기원을 가서
커피내기 바둑을 두곤 했다.
그가 이끄는 우리의 문정문학엔
그 이후로 수많은 회원들이 가입해 온다.
국보 최선우,강태공,박건호(작사가)
이 후
나와 연락이 두절되고 그가
아내에게 받치는 노래로
메스컴에 오르내리고
TV에 모습이 나타나는 등
세상에 나타났을 때 그는 조금은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1980년 초
문정문학 동인인 김준현에서
영월의 송화사 주지인 경월스님으로 변해 있었던 그를 찾아 가려고
몇몇 옛 문정동인들이 만났을 때
운파가 나왔다.
밤새 열차를 타고가며
그는 그 노래 한곡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자랑을 했다.
박건호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 하나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아파트 하나를 선사받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운파의 가사는
대부분 시적인 면이 많다.
일반 작사가들과는 확실히 뭔가 달라도 다르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로남,옥경이,칠갑산 등등..
그것은
그가 순수문학을 하려했던
문학도였기 때문이리라.
그 후
느닷없는 운파형의 이유도 모를 잠수로 인하여
문정은 깨어졌고
문정에 뒤 늦게 가입한
자칭 고물장수 낙서가 강태공,
서울상대를 나오고도 빌빌 거리던 최선우,
국문학자 이가원 박사의 아들 미스타 리 이동식,
후에 mbc 코메디 프로의 스크립터로 스카웃 되어간 똥배 오진근 등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낙서회가 탄생했다.
말인은 후에 재대 후 그 곳에 가입을 했고
바로 이 한국낙서회에서
기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2005년도
그 운파의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반포에 소리그림이라는 음악 사무실을 열고 있으며
사랑의 교회 안수집사로써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http://www.sarang.or.kr/pyung/pyung_02.asp?page=1&db_idx=48
아우의 교회에
신앙간증을 하러 온다기에
아우에게 연락처라도 받아두라고 부탁을 해서
명함을 한장 받아 두었다.
지금은
가는 길도 다르고
만나본 지도 엄청 오래되어
그냥 인터넷에서
그의 소식을 보고 들으며 지내고 있다.
운파형은 당찬 면이 많았다.
국립공보관의 전시실을 빌리러 갔을 때
공인된 모임이 아니면 장소를 내 줄 수 없다는 데도
그는
한국문인협회 문정문학동인이라고 큰 소리쳐서
결국 국내 최대이자 유일의 국립공보관을 빌리 수 있었던 거다.
시화전은 그 후
내가 군에 입대하던 7월 다음 달인 8월에 열렸다.
화가 김덕춘과
윤금자가 그림을 맡았고
우리는 시만 춤품을 했다.
물론
후원은 한국일보사였다.
나는 참석은 못했지만
나름대로 성황리에 마쳤다는 거였다.
술은 잘 못마시는 운파형이었지만
그를 무던히도 잘 따르던 여인이 있었다.
강원도 영월인가에서
끈질기게 날아오는 편지의 주인공-옥경이였다.
그는 늘
베일 속에 가려져 사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옥경이 만큼은 늘 오픈해서 보여 주었다.
품고 다니는 사진도,
받은 편지도...
그러나
그는 사생활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우리들 중엔
그가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이나 있다느니
아니면 이혼을 했다느니
추측만이 분분했다.
그가 휘갈기는 글은
힘이 있었다.
사물을 표현하는 기법이 무척 예리했다.
그러나 그도 운이 없었다.
글쓰기 실력이래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나 나나 우린 운이 되게도 없었다.
나도 한두번 떨어진 기억이 있는 신춘문예..
주간지 뒷장 독자란에나
글 몇자 끄적여 올리는 것으로
울분과 욕구를 풀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었다.
학원이라는 전국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발간되던
국내 유일의 청소년 잡지에
6개월 동안 써서
장편소설(200자 원고지 1800매 분량) :어둠이 깃드는 해변"을 투고했다가
멋있게 떨어진 이후로
추리소설을 쓰겠다고 껍적대다가
그도 신통치 않자
아예
창작과 비평을 통하여 혜성처럼 등단한
분례기의 방영웅처럼
나도
무언가 큰 거를 한번 터트려 보자는 욕심에
대하 장편을 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을 때였다.
목표는 경향신문이었고
주제는 장돌뱅이 이야기였다.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고장난 삶을 사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운파가 가장 좋아하던 주제가 바로 고장이었다.
10명의 문학도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운파형은
자연히 내가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화신백화점 건너편에
신신백화점이라고 있었고
그 신신백화점 뒷골목에
어느날 운파가 뚱딴지같이
한식집을 차렸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가서 문을 닫았다.
지금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왜 갑짜기 식당을 차렸고
왜 황급히 문을 닫았는지..
운파는
시간만 나면 회원들의 집을 불시에 찾아가곤 했다.
그가 나의 비좁은 단칸방을 찾아 온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대낮부터 찾아와
방 안 한 복판에
큰 대짜로 누워
한참씩 잠을 이루다 가곤 했다.
한잔만 마셔도 온 몸이 붉어지는 체질인지라
술은 도통 못마셨지만
석초를 만나면 기원을 가서
커피내기 바둑을 두곤 했다.
그가 이끄는 우리의 문정문학엔
그 이후로 수많은 회원들이 가입해 온다.
국보 최선우,강태공,박건호(작사가)
이 후
나와 연락이 두절되고 그가
아내에게 받치는 노래로
메스컴에 오르내리고
TV에 모습이 나타나는 등
세상에 나타났을 때 그는 조금은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1980년 초
문정문학 동인인 김준현에서
영월의 송화사 주지인 경월스님으로 변해 있었던 그를 찾아 가려고
몇몇 옛 문정동인들이 만났을 때
운파가 나왔다.
밤새 열차를 타고가며
그는 그 노래 한곡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자랑을 했다.
박건호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 하나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아파트 하나를 선사받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운파의 가사는
대부분 시적인 면이 많다.
일반 작사가들과는 확실히 뭔가 달라도 다르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로남,옥경이,칠갑산 등등..
그것은
그가 순수문학을 하려했던
문학도였기 때문이리라.
그 후
느닷없는 운파형의 이유도 모를 잠수로 인하여
문정은 깨어졌고
문정에 뒤 늦게 가입한
자칭 고물장수 낙서가 강태공,
서울상대를 나오고도 빌빌 거리던 최선우,
국문학자 이가원 박사의 아들 미스타 리 이동식,
후에 mbc 코메디 프로의 스크립터로 스카웃 되어간 똥배 오진근 등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낙서회가 탄생했다.
말인은 후에 재대 후 그 곳에 가입을 했고
바로 이 한국낙서회에서
기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2005년도
그 운파의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반포에 소리그림이라는 음악 사무실을 열고 있으며
사랑의 교회 안수집사로써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http://www.sarang.or.kr/pyung/pyung_02.asp?page=1&db_idx=48
아우의 교회에
신앙간증을 하러 온다기에
아우에게 연락처라도 받아두라고 부탁을 해서
명함을 한장 받아 두었다.
지금은
가는 길도 다르고
만나본 지도 엄청 오래되어
그냥 인터넷에서
그의 소식을 보고 들으며 지내고 있다.
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
글쓴이 : 末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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