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2
화사한 토요일 오후 한 주 동안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려고 산으로 향한다. 쏟아져 내리는 4월의 햇살이 산 기슭의 굵은 마사토 위에서 은빛으로 부숴진다. 실바람 불어오는 들머리 곳곳엔 연분홍 참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솔향 그윽한 바위지대를 지나 전망 좋은 곳에 지어진 팔각정의 난간에 기대어 앉아 방금전 벗어난 사바세계를 내려다 본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저 복잡한 틀 속에서 옥죄어오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하며 사는 우리네 모습들.. 짧은 한평생을 살아가며 무엇이 그리도 갖고프고 차지하고픈 것들이 많은지... 어느 때가 되면 저도, 나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산산히 흩어지고말 허무한 존재들이거늘.. 무슨 마음들이 그리도 가볍게 날라다니는지... 잠시 호홉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긴다. 한패거리의 중년을 넘긴듯한 사람들이 남녀 뒤섞여 산을 오른다. 차림도 모습도 산행을 즐기러 온 차림은 아니다. 하얀 비닐 봉투 위로 삐죽히 보이는 술병이며 오징어,돗자리등등으로 보아 행락객들임에 틀림없다. 산에 오른다고 산행만 즐기라는 법은 없으리... 그들도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안고 토요일 오후 짝지어 산을 찾았으리.. 정상 언저리에서 갖고 올라온 탁주를 한잔 들이킨다. 목구멍을 훑으며 넘어가는 술맛이 예전같지가 않다. 몸둥이에 지병을 하나 얻어가진 이래로 어느날부터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술이 주는 기분... 그저 덤덤히 목이 타니 드리킨다는 마음뿐이다. 이마에 몇방울 맺힌 땀을 수건으로 훑어내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지기 시작한 개나리 꽃자리마다 파릇파릇 연초록 새순들이 돋아나고 있다. 능선길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사잇길로 들어섰다. 지난 해 진 마른 낙엽들이 발밑에 밟혀온다. 어느 나무가지엔 아직도 매달려 있는 마른 잎새 사이로 초록색 새 잎들이 돋아나 있었다. 무슨 미련이 아직도 남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자연은 어김없이 그들의 미련따위엔 아랑곳없이 새 순을 돋게하는데... 흡사 나도 멀지않은 시간 안에 저런 마른 나무잎새가 되어 이 세계로부터 밀려나야 하겠지... 덧없다. 삶은 덧없는 거다. 저기 내려다 보이는 한강... 수천년을 저렇게 변함없이 흐르고 있겠지만 우리네 삶은 그 곁을 바람처럼 스쳐지나갈 뿐이다. 백제의 유적지라는 아차산성을 벗어나 동쪽 사면길로 내려선다. 길게 쳐진 철조망을 따라 한강을 향하여 가파른 경삿길을 내려가다보니 우측 골프장 길이 나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초록색 그물망을 향하여 공 날리기에 열중이다. 그 그물망 아래를 통과하고 나니 흐드러진 워커힐 벗꽃길이다. 전날 어린이 대공원에서 본 벗나무 보다도 더 굵은 고목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지마다 하이얀 벗꽃들이 만개하여 빽빽히 피어있다. 화사하다. 짙은 벗꽃향이 코끝을 찌른다. 중심쪽으로 가까이 가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있다. 사진촬영에 열중인 사람들.. 벗꽃보다 더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쌍쌍들.. 즐비한 차량들.. 벗꽃축제가 한창이다. 워커힐 쪽에는 임시 노천 레스트랑에서는 즉석에서 만든 각종 요리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노천까페 앞에서는 흩날리는 벗꽃 아래서 오보에와 하프로 when i dream 을 감미롭게 연주하고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흩날리는 벗꽃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물 안개 그윽한 한강은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그림그리는 화동들을 벗어나 약수터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사진 주택가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맷돌로 콩을 갈아 만든 두부집으로 산행에 지친 몸을 던져 넣었다. 고소한 두부에 김치와 보쌈을 얹은 안주에 서울탁배기로 갈증에 겨운 목을 추긴다. 어느 덧 어둠은 도회지를 덮어왔고 바람은 한결 더 차갑게 느껴지게 불어온다. 불켜진 상점들을 지나 모텔이 즐비한 골목을 벗어나 큰 도로가로 나섰다. 많이 피곤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오직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뿐이었다. 문득 삶이 고단할 때 이렇게 돌아갈 곳이 없다면...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엄청난 절망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무서울까? 영원한 삶? 그건 공포다. 조금 더... 의 삶은 그런대로 좋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죽지않고 끝도없이 살아간다면 그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희망이다. 죽어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마지막 축복이다. 뜸했던 그로부터 혼사에 초대받아 터미날에서 예의 요식행위를 마치고 난 시간은 두시.. 내친 김에 여의도로 향한다. 모두들 요란을 떠는 벗꽃필 때의 여의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마음을 가슴가득 안고 지하철에 마을버스에 또 버스를 갈아타며 여의도에 이른다... 날리는 벗꽃잎들 사이로 새파란 잎새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축제도 다 떨어져가는 벗꽃처럼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인파들을 뚫고 저마다 예술가인냥 긴 머리에 깍지않은 부시시한 몰골로 거리에 자리잡고 앉아 초상화를 그려주는 길거리 화가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아마도 국회의사당을 한바퀴 돌면서 그들의 숫자를 모두 세었더라면 500명은 실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매달려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벗꽃은 아랑곳없이 저마다가 저마다를 구경나온 듯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이다. 한젊은이가 통기타를 메고 국회의사당 담장 위에 올라가 무언가를 지껄이고 있고 그들 앞에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박수치고 깔깔거리고 있다. 흥미로와 잠시 그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 이 글쎄 며칠전 찜질방엘 갔드랬지 뭡니까.. 그런데 한 노인네가 한쪽 다리를 들고 다리를 양팔로 벌리고 겨우겨우 균형을 잡고 서 있지 뭡니까?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지요? 왜 이러고 계십니까? 아 그 노인네 대답이 걸작입디다. 아 이렇게 학처럼 서 있으면 장수한다고 해서 그렇게 서 있답디다. 그래서 내가 그 노인네 엉덩이를 발로 쎄게 팍 밀어버렸지요. 그냥 엎어지는게 아닙니까? 모두들 나를 보며 의아해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때 내가 한마디 했어요. 거북이는 학보다 더 오래 산답니다...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몇가지의 래퍼터리로 좌중을 웃기던 그가 기타를 담는 가방을 벌리고는 관중들 속을 다니며 모금을 다니는 거다. 명분은 불우아동을 돕는데나? 많은 돈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게 보였다. 족저근막염이 또 도지나 보다. 발 뒷굼치가 아파온다. 생각은 모처럼이라 여의도에서 유람선을 타고 뚝섬나루까지 가려했으나 여의나루까지 걸을 수가 없었다. 연이틀 많이 걸은 것이 무리였던 것 같았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종로에서 내렸다. 일요일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동대문 시장도 휴점한 곳이 많아 썰렁했다. 시장 통으로 들어가 생선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선다. 좁고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다락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꽁치 한마리,굴비한마리, 삼치한마리가 들어왔다. 잘익은 갓김치도 덤으로 따라 나왔다. 양손으로 뚝배기를 잡고 탁배기를 벌컥벌컥 마셨다. 언젠가 막걸리 좋아하는 털털한 서예가 姜舞와 함께 왔었던 곳이었다. 두어 대포로 요기를 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청계천 쪽으로 걸었다. 만든지 얼마 안된 청계천... 물 속 개천 바닥이 시꺼멓다. 맑고 깨끗한 자갈들이 깔려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다. 얼마나 불결한 물이 흘렀기에 벌써 저렇게 개천 바닥에 불순물들이 쌓여있을까? 걷다말고 택시를 탔다. 왕십리 중앙시장 지하상가.. 그 곳 앞에서 내렸다. 국산장어가 ㅣ키로그람에 24000원이란다. 젊었을 적에 한 미모 했을 듯 싶은 주모가 그 장어를 구워주는데 15,000원을 달란다. 잘게 썰은 생강에 버무려 금방 구워내 온다. 노릿노릿 생각보다 맛있게 구워졌다. 또 한잔 해야지... 어제부터 참으로 많이도 마셨다. 술이 싫어진다. 술이 싫어지니 시간도 지겨웁다. 어제 그 시각처럼 또 돌아가고픈 마음 뿐이다. 제밥 불러온 배를 추스리며 거리로 나섰다.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언젠가 겨울 엄청나게 많은 함박눈이 퍼붓던 날 어느 여인과 걸었던 그 거리였기에 잠시 그녀가 생각났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생애 있어서 나를 스쳐간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내개 무엇을 주고 갔으며 나는 또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세월은 내게 쓰러진 열정과 망가진 육신과 이루지 못한 꿈들만을 남긴 채 흘러갔다. 이제 남은 세월은 또 내게 무엇을 줄 것인가? 모처럼 산을 벗어나 이 곳 저곳 이틀동안 무척도 많이 걸으며 많은 생각들과 함께 보냈다. 피곤한 발바닥의 고통이 이제 그만 작은 방황에서 벗어나라고 하고 있었다. 그래 내일은 월요일이다. 세무사에 전화해서 왜 이렇게 많은 소득세를 나오게 했냐고 따져 봐야지.. 그리고 그 질긴 채무자에게 독촉전화를 해야지...출처 : 도봉에서 관악까지글쓴이 : 末人 원글보기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