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2

말인의 피서

末人 2004. 8. 12. 09:14

 

고요만이 감도는 어둔 새벽,
죽음과도 같은 정적을 깨는 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친구로부터 걸려 온 전화벨 소리였다.
출발은 7시 10분에 하는 거야~!!!
갑짜기 당겨진 출발 시간이었다.
가자면 가야지 별 수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나
대충대충 차에 짐을 실었다.
전날까지 메모장 빽빽히 적어둔 준비물대로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싣다가
나중엔 너무도 복잡한 것 같아 대충대충 짐작하며 실었다. 

 

출발 시간이 당겨지는 바람에
준비 안 된 것들을 아침 일찍 일어나 챙기려던 계획이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의 들뜬 마음만 챙기면 다 될 거라는 여유가 있었다.
느긋하게 짐을 대충 때려 싣고
출발...
그러나 사단은 출발 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터져나왔다.
앗차차차차...
카메라도 안 싣고
심장약,
얼린 물,
물통 등등 빠트린 게 한 둘이 아니었다.
허지만 어쩌랴~!
약속 시간만큼은 어지간해서는 어기지 않는 성격이라
그냥 내쳐 달려야 했다.
그래, 그냥 가자...
어쩔 수 없다.
내게 없는 것 쯤은 저들이 갖고 올수도 있지 않은가... 

 

일탈이 주는 작은 여유로움마저 못느껴서야 되겠는가?
애써 작은 실수에대한 생각들을 지우며 한강을 건넌다.
일요일이었지만
시간이 이른 탓에 차량들이 뜸하다.
둔촌동 1번 출구에 정확한 시간에 차를 댔다.
잠시 빠트린 것들에대한 아쉬움에 젖어 있는 동안
오늘 함께 하기로 한 두 팀이 나타났다.
부득불
승합차 한대로 출발하자는 의견에 따라
S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짐을 모조리 옮겨 실었다. 


팔당을 끼고 차는 시원스레 달렸다.
대성리로 가는 강변도로는 한가하기 이를데 없다.
지글거리는 폭염속에
무던히도 시달림을 받았는지
산천은 힘이 없이 흐릿한 윤곽만을 드러낸 체 고요하기만하다.
고요를 깨는 건 언제나 매미의 몫이었다.
저 매미마저 없다면 여름이 얼마나 삭막할까...
산천에 널린 푸성귀들도
모두 더위에 지쳐 착 까부라져 있는데
매미의 울음마저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경춘가도에도 별로 차가 없었다.
휴게실에 들어 커피를 한잔씩 나누고 다시 달렸다.

 

선착장에 들러 피라미며 쉬리,누치, 빠가사리등등 잡어를 조금 샀다.
전에만 같았어도 모두 직접 잡아 해결이 가능했을 물고기였건만
이즈음은 그게 쉽지가 않았다.

 

행선지 들머리에 차를 정차시키고
필요한 이것 저것들을 샀다.

 

가로 30CM 세로 5CM, 두께 2CM....
머릿 속에 그렸던대로 선홍빛 목살을 썰어 달랬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준비하기로 하고
당장의 요기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만을 챙긴 체 행선지로 향한다.
보기에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얀 자갈들이
수없이 깔린 개울을 따라
상류로 상류로 올랐다.
드높은 산사이를 뚫고 흐르는 계류 위엔 군데군데
짙은 산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한결 더한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는 최상류로 향했다.
발이 시릴 정도로 수온이 낮았다.
넓다란 바위와 아름다운 돌들과
콸콸대는 물과 짙푸른 수목이 만들어주는 넓은 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둘러보는 사방이 마냥 평화스럽기만 하다.
산 정상 능선 위에는 파랗고 청명한 하늘이 있었다.
순결처럼 맑고 깨끗한 파아란 하늘 한켠엔
하이얗고 탐스런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돌을 받치고 철망을 걸고
연탄숯을 피운 후
두툼한 돼지목살을 올렸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가장 나약한 치부인 먹는 모습을 보여야만 될 수 밖에 없다는 게
조금은 안타까왔지만 어쩌랴...
고파오는 배를 무엇으로 해결하랴...

 

잣으로 담근 동동주 한잔이
갈증에 겨웠던 몸둥이의 중심부를 타고 내려가
공복의 빈 구석을 차고 오르니
아~! 살맛이 났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마음 맞는 벗과 한 잔 술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실로 오랫만에 함께 해보는 벗들과의 한 때였다.
온 세상을 태워버릴 듯 달구어내는 태양이
흐르는 물에 부딪치며 반짝인다.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술맛을 올린다.
주거니 받거니
취기가 오른다.
나는 왜 이럴 때 쯤이면
단 한귀절의 싯귀도 토해내질 못할까?
그냥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내려와
나를 취하게 만드는 술의 마력만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비록 잡아놓은 것을 사온 물고기였지만
냄비를 걸고 매운탕을 끓였다.
땀이 나도록 치댄 밀기루 반죽이 쫀쫀하기 그지없다.
뜯어뜯어 넣다보니 진하고 얼큰해보이는 국물이 냄비 밖으로 타고 넘어버린다.
입천장을 데는 줄도 모르고 훌훌대며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뜨거운 것을 먹은 탓에
온몸이 또 땀으로 뒤엉켜 있다.
텀버덩~!
물로 뛰어 들었다.
소금쟁이가 놀라서 황급히 물살을 가른다.
수많은 고추잠자리들이 머리 위를 배회한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물소리와 더불어
시원한 여름을 노래하고 있다.
햇살에 달구어져 뜨거운 자갈을
맨발로 밟으며 발바닥 맛사지를 해 보았다.

 

물기가 줄줄히 흘러내리는 옷차림으로 계곡 옆 가파른 산을 올랐다.
등산로도 없는 잡목들이 빽빽히 늘어선 곳들을
온몸으로 뚫으며 작은 물통 하나만을 손에 든 체
A군과 함께 올랐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솔향이 은은히 코끝에 와 닿는다.
너무 자라 억세져버린 참치 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솔잎이 발잔등까지 쌓여있는 솔나무 밭을 지나
정상 쪽으로 오르니 정상 바로 전 능선 안부 쪽에
넓은 공지가 나왔고
공지 한가운데서 웬 무덤이 하나 나타났다.
이곳에 누군가를 모셨을 저들을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 가파르고 높은 곳까지 어찌 올라왔을까...

 

상수리 나무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부러져 떨어진 가지 끝에
아직 설익은 상수리가 껍질 속에서 애처로이 죽어가고 있었다.
파아란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도회지에선
수채화로나 볼 수 밖에 없는
뭉게구름이 하얗고 부드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야,
옛날 생각 안나니?
어린시절
자주 만나 쏴헤매던 망우리 뒷산에서의 추억들이 떠오르나보다.
무덤과 무덤사이를 헤매던 내가
어느 이름없는 묘앞에 뎅그라니 서있는 묘비문을 발견했다.
세운지 오래되어 비바람에 깍이고 삭은 묘비였지만
인각된 글자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내 사랑 여기 잠들다-

 

잠든 사랑이 누구며 잠든 이를 사랑한 이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묘비...

 

나는 그 날로부터
나의 자애 무덤으로 명명했었다.
그로부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던 그 무덤... 그리고 자애...

 

나는 잊었는데
A가 생각해내서
나의 잠자던 어제를 들쑤셔 깨운다.
그때가 좋아었지...
젊어서 좋았고...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어 좋았고...
마음대로 걸을 수 있어 좋았고..
나 이외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마음이 있어 좋았었는데....

 

문득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젊음과 어제들에 대한 회한에
가슴이 저려온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하산을 서둘렀다.
마냥 길기만 했던 여름날의 낮도
서서히 저물어간다.
마주보고 쳐놓은 두 채의 텐트 가운데에
넓다란 돋자리를 펼치고 모두 모여 앉았다.

 

사는 이야기나 하잖다.
사는 이야기를 들어 무엇하리..
다 그런 거지...
들으면 답답하고 불만스럽고
불안하고 걱정되고...
경제도 지껄여보고
정치도 욕해보고
늙은 몸둥이도 탓해보지만 무엇하나 후련해지는 게 없다.

 

별이 있는 산길이나 걸어보자...
모두 일어나 산길을 걸었다.
초롱초롱한 북두칠성의 7개의 별이
바로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다.
예전에 배워서 알고 있었던
몇개의 별자리들이
지금은 어느 게 어느 건지는 모르겠지만
초롱히 빛나고 있었다.
인공의 불빛이 없는 산간의 밤은
순수한 어둠, 바로 그 자체였다.
어둠도 덧칠되어지지 않은 순수라 생각하니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먼저 돌아와
돋자리에 홀로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정적만이 있을 것 같았던 산간이
온갖 소리들로 인하여 깨어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소리
별이 부숴져 내리는 소리...
숨쉬는 대지의 숨결이었다...
그러다 잠든 밤이 너무도 편했다.


풀벌레의 소야곡에 잠들고
별빛의 포근함에 뒤덮혀
바람의 다독거림을 받으며 잠들었던 밤이
너무도 편했다.
새벽,
이슬내린 풀섶을 헤치며
앞산을 오른다.
새벽의 불청객에 놀란 벌레들이 황급히 자리를 옮긴다.
짙은 풀향이 가슴속까지 저며든다.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희뿌연 운무가
나를 녹여버릴 듯 번져온다.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신다.
목구멍을 타고 넘는 건 어디 커피 뿐이랴..
아침의 해맑은 산간의 정기가
모두 목구멍 속으로 빨려 넘어온다.

 

청평호수의 시퍼런 물바다를 끼고 달리는 강변도로...
물살을 가르는 수상스키어들의 질주를 바라보며
한가롭기 그지없는 도로를 달려달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잠시 차에서 내려
호숫가에 정박되어 있는 낡은 목선 앞에서
찰싹이는 호반의 파문을 바라본다.


내가 있어도
그리고 내가 없어도 찰싹일 저 물결...

무심한 물결처럼
모든 자연은 말이 없고
나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