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사랑할 때다
末人
하루 해가 뉘엿뉘엿 서편 하늘로 기울어 가고 있다.
길다랗게 늘어선 산맥 위로 펼쳐진 새털구름들..
짙은 노을이 그 구름들을 붉게붉게 물들이고 있는 시간...
황혼이다....
흔히들
삶의 노년을 황혼이라고 한다.
이슬맺힌 새벽을 지나
찬란한 아침햇살 부숴지던 아침을 건너
태양이 포탄처럼 작렬하던 한낮을 뚫고
이제 고요와 안정,
휴식과 회고의 시간, 황혼의 저녁무렵이다.
이 때 쯤이면
온갖 풍파,온갖 시련을 겪으며 쌓인 피로를 조용히 내려놓고
편안한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를 누구나 소망한다.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난 인생을 회고하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흥미있는 소일거리를 찾아 삶의 나머지 시간들을
의미롭게 보낸다던가...
아무튼 삶의 황혼기는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것이 마음 먹은대로 이루어지질 않는다.
이 때 쯤이면
질곡된 삶의 훈장처럼
누구나 크건 작건 노년이 가져다 주는 만성 질병을 하나씩
선사를 받게 되어
제 2의 삶의 시련을 맞게되기 일쑤다.
나도 이미
십년 전 쯤
심근경색이라는 조물주의 마지막 선물을 하나 받았다.
이 선물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곧 호출명령으로 바뀌어
저 죽음의 나라로 불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깆게 되었던 적이 있다.
처음엔 억울하고 답답하고 무섭고 당혹스러웠지만
어느날 마음을 고쳐먹고
이제부터의 나의 삶은 공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 생각하고 사니
모두가 즐겁고 모두가 새롭고 모두가 희망이 되어 주었다.
어제 가까운 친구가 위암판정을 받았다.
얼마 전 또 다른 친구가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었는데
이 친구가 또 이런 판정을 받았다니
놀랍기 보다는
그래 이것이 황혼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위암친구와 커피 잔을 가울이며 우리는 멋적게 웃었다.
"이제 갈 때가 슬슬 우리에게도 오고 있다"라며..
아무 것도 모르고 날뛰던 철부지적 친구들이
이 병 저 병 무슨 군대 갔을 때 병과 배정 받듯
하나씩 받고 살고 있으니
언제 어느 때 소집영장이 떨어져 불려갈지도 모르쟎은가...
황혼이 아름답다라는 생각도 미처 하기 전에
질병과 싸워야하고 시달림 받아야하니
조금은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대로 그냥 주저 앉을 수는 없다.
우리들의 대화 끝에 얻은 결론은
이제 사느라고 짊어졌던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나
지금보다 더욱 편하게
아무런 근심걱정 가지지말고
지금 보다도 더욱 즐겁게 살자 였다.
나는 본래가 낙천적 소유자라
어지간한 일에는 스트레스 따위는 받지 않고 살았기에
십년 전 심장병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별 느낌도 없었고,
그러했기에 내 생활에 변화도 별로 없었다.
좋아하는 술도 늘상 즐기며 살아왔고
하고픈 취미 그냥 그대로 즐기며 살아왔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연민에 가슴 콩당거리며 살아왔고
콩당거림을 참을 수 없으면 그니와 술잔도 기울였다.
얼마 전에도 천렵을 갔었는데
그 중엔 나이 지긋하신 동네 어른도 계셨다.
술잔을 나누고 이런 저런 대화 끝에
그 분이 펼치는 연애학에 배꼽을 잡고 폭소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날 함께한 9명의 일행 중
유일하게 여성 한분이 끼었는데
그 여성 분이 바로 그 나이 지긋하신 분의 애인이었다.ㅋㅋ
그 분의 말을 빌리면
그 여성분은 2001번째 애인이란다.
그러면서도 그 여성분을 바로 옆에 앉혀놓고서도
이 애인과 강렬한 쎅스를 교환하고 지낸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엔 파워가 넘쳤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이글거리는 정념이 있었다.
호탕한 웃음 속엔 즐거운 삶의 여유가 넘쳐 흘렀다.
그래,바로 저거야...
늙었다고 움츠리고, 감추고,주저하고,회피하다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깐 질병 따위야
젊었을 때 얼굴에 생긴 여드름 쯤으로 치부해 버리면 될 일이다.
노년의 나이에 애인을 만들고 연애를 한다는 것은
이십대 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니를 만나면 마음이 설레이고
가슴이 뛰고 온몸이 요동치는데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인가...
아름다운 노년
불타는 황혼..
물들어오는 서편하늘에서 희망을 보자
깃드는 어둠 속에서 별빛을 보자..
희미해져 가는 심장박동 속에서
남았있는 모든 정열을 끄집어내어
마지막 불꽃을 피워내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바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